우리의 성화와 장성을 불러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람이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으면 그만큼 정력도 쇠하고 안력(眼力)도 쇠하고 잘 보이던 눈도 침침해질 것이고 잘 들리던 귀도 조금 침침해지게 되어서 그전에 젊었을 때와 같이 기민하게 알아듣고 기민하게 말할 수가 없고 그래서 시원시원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에게 혹은 일반 사람들에게 항상 늙은 그 유세(有勢)나 보일까, 늙음으로 말미암은 병폐인 무기능이나 쇠퇴(衰退)나 쇠잔(衰殘)을 가지고는 밀어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눈치도 빠르고 눈도 밝고 귀도 밝고 말도 잘하고 활동도 잘하고 그래야만 주님을 잘 증거할 수 있다는 이론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야만 주님을 잘 증거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결국 ‘사람은 늙어서는 주님을 백 퍼센트 선명하게 잘 증거하지 못하도록 아주 선천적으로 마련하셨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인간의 신체 조건이 쇠퇴하는 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증거력도 쇠퇴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겉사람은 썩고 폐해서 점점 쇠잔해 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 선생도 “나이 많은 나 바울은···”(몬 1:9) 하고 자기 나이가 많은 것을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이 나이가 많아서 젊었을 때 가졌던 그 빛나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의 능력이 쇠잔했다든지 쇠감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죽는 그 시간까지 절정을 향해서 올라가다가 부르시니까 가 버린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90세 넘게 참 오래 살았는데, 그가 주님 앞에서 완고하고 아집투성이고 자존망대(自尊妄大)하는 사람이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의 제자가 폴리캅인데 그는 자기 스승인 사도 요한 선생이 늙어 갈수록 성자(聖者)로서 빛이 더 나서 그의 지혜나 그의 가르침이나 그의 모든 전파하는 것이 죽는 시간까지 에베소 감독으로 앉아 있으면서 찬연하게 빛을 내고 갔다고 증거했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의 몸이 죽는 순간까지, 즉 육신이 영혼과 분리되는 그 시간까지 우리의 속사람은 참으로 빛나게 장성해 나가는 것이 중생한 사람이 당연히 걸어가야 할 코스입니다. 육신이 쇠잔해지고 이 장막이 차츰차츰 쇠퇴함과 함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빛도 마치 관솔불이나 횃불이 차츰 꺼져 가듯이 사그러지다 나중에는 픽 쓰러져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예술가나 문학가나 이 세상의 영웅들에게는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러지 않아야 할 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나타나는 일이 많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 일이 아니라 종교의 일일 뿐입니다. 세상의 예술가나 정치가나 종교가는 그런 길을 걷습니다. 한때 생활의 전성기에 찬란하게 빛을 비추다 차례차례 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면 나빠진 만큼, 즉 이 껍데기가 벗겨져서 기지(機智)나 총명(聰明), 건강, 발랄한 희망, 욕망, 정열, 이런 것이 탁 꺾어지면 꺾어진 만큼 겉사람에게 가려 있던 찬연히 빛나는 속사람이 그만큼 구실을 더 해야 합니다.
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제 7권: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162-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