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파이퍼: 믿음 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가 오직 믿음 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의 게시물을 그의 선교단체 Desiring God 웹사이트를 통해 올린 것이 지난 2017년 9월 25일입니다. 평소에 개혁주의 구원론에 가까운 설교를 하여서 “개혁주의적 침례교”(Reformed Baptist)라는 수식어가 그에게 종종 부여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 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결코 개혁신앙이 아닙니다. 그의 주장은 차라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것과 가깝습니다.
존 파이퍼의 2단계 구원론
파이퍼의 게시물을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칭의(justification)과 최후구원(final salvation)의 2단계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아래는 그의 게시물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칭의의 경우, 믿음을 통해, 우리를 떠나 그리스도가 완수한 공로를 받아 우리의 것으로 인정 받는 것이며 그 공로를 전가받는 것입니다. […] 최후 심판 때 받는 최종 구원의 경우, 믿음이 그것이 가져온 성화의 열매를 통해 확인 받는 것이며, 우리는 그 믿음과 그 열매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John Piper, “Does God Really Save Us by Faith Alone?“
보셨듯이 파이퍼는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최후구원은 믿음만이 아닌 그 열매 곧 성화의 열매를 통해 받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파이퍼의 주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도 최후구원 때 구원 받지 못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에 대한 파이퍼의 대답으로 올라온 게시물의 일부를 아래 번역합니다:
아무도 칭의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 나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100% 지원하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것을 근거로 내 죄 죽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John Piper, “Will We Be Finally ‘Saved’ by Faith Alone?“
이상과 같은 파이퍼의 구원론은 최근에야 그에게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다음은 그가 1999년 8월 8일에 행한 설교 가운데 일부 번역입니다:
그리스도인서 생활하는 최초에 무죄를 선고하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는 ‘무죄’라는 선고를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처음 의롭다하시는 시점에는 행위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에 반해 야고보가 ‘행위를 통한 칭의’를 단언할 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살아가는 동안 의롭다하심을 받는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 행위가 절대로 필요함을 말합니다. […] 야고보에게 ‘행위를 통한 칭의’라 함은 ‘믿음과 더불어 필요한 믿음의 증거 곧 사랑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John Piper,”Does James Contradict Paul?”
관련하여서 파이퍼가 목사직에서 은퇴할 때 까지 시무했던 베들레헴 침례교회의 신앙 고백 가운데 일부(번역)를 보겠습니다.:
10.3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고, 미래 지향적이며, 그리스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심령에 만족을 주는 믿음은 삶을 변화시킨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로써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 곧 장차 임할 최후 구원은 생활의 변화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받는 다는 것과 모순은 아니다. 칭의를 받는데 유일하게 필요한 믿음은 홀로 머물지 않고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베들레헴 침례 교회, 장로들의 신앙 서약
2단계 구원론과 개혁주의 구원론의 차이
어려운 이론을 펴기 보다는 간단한 비유를 통해 파이퍼의 2단계 구원론과 개혁주의 구원의 차이를 말하겠습니다.
2단계 구원론을 비유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시는 강좌를 수강하고 싶은데 우리는 등록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등록금을 내 주셨고, 우리는 강좌에 등록되었습니다. 수강 학점을 받기 위해서는 기말 고사에서 낙제하면 안됩니다. 시험은 아무도 대신 봐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분이시고 100%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말고사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열심을 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말고사에서 낙제 하지 않고 무사히 학점을 받을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상과는 달리 개혁주의 구원론을 비유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시는 강좌를 수강하고 싶은데 우리는 등록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등록금을 내 주셨고, 우리는 강좌에 등록되었습니다. 수강 학점을 받기 위해서는 기말 고사에서 낙제하면 안됩니다. 기쁘게도 시험 문제 답안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작성하셨고, 그리스도의 성적을 수강생들의 성적으로 하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여전히 기말 고사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수강생들에게 각자에게 걸맞는 상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성적은 공식 기록에 남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성적이 대신 기록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말고사에서 낙제 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고 오히려 그날을 기대합니다.
2단계 구원론과 개혁주의 구원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감을 잡으셨기를 바랍니다. 차이가 물론 한 두 가지는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개혁주의에서는 2단계 구원을 말하지 않고 하나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개혁신앙에서 말하는 칭의, 성화, 및 영화는 하나의 구원이 각 시점에서 보이는 다른 면모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로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우리의 칭의, 성화, 및 영화가 다 보장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대변 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순종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값은 치뤄졌으며,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사건으로 대변 되는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을 통해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의 의가 완전히 만족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만 그리스도에게 전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 역시 우리에게 전가 된 이중전가가 개혁주의 구원론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2단계 구원론과 개혁주의 구원론의 공통점 역시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성상 죽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신께서 다시 살리신 사람이므로, 생활의 변화가 반드시 발생함을 고백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 변화의 정도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워도, 만일 참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면 구원의 신앙을 소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선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의 논리를 조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 ⇒ “선행”
졸인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수학 시간에 논리를 배웠는데, 그 때 배운 바로는 위와 같은 논리 구조가 있을 경우 ‘구원’은 선행의 충분조건이며, ‘선행’은 구원의 필요조건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행은 구원의 ‘필요’한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선행이 구원의 근거 혹은 원인이 되는 것 처럼 이해하면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복음을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열매는 어디까지나 열매지 뿌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언약신약과의 관계
이상과 같이 파이퍼의 2단계 구원론을 살펴보면 그것이 언약적 율법주의와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파이퍼가 풀러 신학교에서 사사 받았던 다니엘 풀러 (Daniel Fuller) 교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두 사람 모두 행위의 언약(Covenant of Works)을 부정합니다. 행위의 언약을 부정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하신다는 이중전가의 사실을 부정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행위를 우리 구원의 근거 가운데 일부로 끼워넣기가 쉽습니다.
더 읽을거리
웨스트민스터 캘리포니아 신학교의 클락 (R. Scott Clark) 교수의 블로그에는 존 파이퍼의 구원론에 대한 비평 뿐만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와 관련된 좋은 자료가 다량 올라와 있습니다. 졸인도 그의 블로그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