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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 | Covenant Theology

행위언약에 대한 교리를 이단시하는 것의 위험

교의학에 관한 제이슨 반 블릿 (Jason Van Vliet) 교수의 저서가 <복음 안에서 자라가기>라는 제목으로 성약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것을 읽고 있다. 제 1권 11장은 ‘언약’이 주제인데, ‘행위의 언약'(Covenant of Works)라는 용어에 대해 부정적이고, 심지어 그 언약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불확실하다는 인상을 글에서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표준은 행위언약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그 고백이 바르다고 믿는 나로서는 반 블릿 교수의 설명이 흡족하지 않았다.

행위언약에 대해 반 블릿 교수가 언급하길 꺼리는 것은 그가 속한 캐나다 개혁교회(CanRC)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캐나다 개혁교회는 네덜란드의 해방파 개혁교회 신도들의 이민을 통해 설립되었고, 해방파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스킬더인데, 스킬더는 행위언약을 언급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스킬더가 행위언약을 부정한 이유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스킬더가 걱정한 것 가운데 하나는 카이퍼 학파의 ‘중생을 전제로한 세례'(presumptive regeneration)가 신자들을 도덕적 해이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카이퍼 학파의 중생전제세례론의 기반에는 (1) 행위언약은혜언약의 구별, (2) 언약의 외적/내적 참여의 구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킬더는 행위언약을 부정하고 언약의 외적/내적 참여의 구별을 부정함과 동시에 언약은 항상 약속과 의무가 함께한다는 주장을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스킬더가 의도한 것은 아니나 (반 블릿 교수가 의도하는 것도 아니나), 행위언약을 부정할 경우 은혜언약에 행위언약이 스며들 위험이 있다.

실제로 그러한 위험에 빠져든 예가 ‘연합적관점'(Federal Vision)이라고 불리는 신학적 주장이다. 이 사상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차이를 무시한 결과 언약적 율법주의에 가까운 주장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스킬더가 행위언약을 부정하게 된 동기에는 그것을 통해 신도들의 열심을 북돋길 원하는 것도 있었으니, 행위언약을 부정함으로써 언약적 율법주의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보자: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언약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있었는데, 아담은 그것을 실패하였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도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담과 달리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였고, 은혜언약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불순종한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행위언약을 부정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킨 것과 같은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신다는 — 이를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 혹은 능동적 순종 교리라고 하는데 — 그러한 복음의 풍성한 내용을 감손시키는 길로 빠져들 수 있다. 능동적 순종의 교리는 복음이 가르치는 이중전가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 한국/한인 교회와 관련하여 상황이 어떤지 인터넷 검색을 조금 해보니, 행위언약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을 부인하면서 그것이 바른 믿음이요 개혁파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터넷 상으로는 서철원 박사와 정이철 목사가 자주 거론된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행위언약과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 교리가 율법주의로 이끄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하나, 실상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행위언약과 이중전가(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율법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부디 성도들은 서철원 박사나 정이철 목사의 잘못된 주장에 미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른 교리를 이단이라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이단임을 자처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