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그리스도
요새 교회에서 저녁 예배 때는 욥기가 강설되고 있다. 아직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을 보고 있다. 그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부분적으로 옳은 얘기도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릇된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가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이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생사화복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세 친구들을 탓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는 아직 계시의 초반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세상이야 윤리를 가르쳐도 나 개인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가에 목표를 두지만, 그리스도인이야 자신이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사 나를 용서하시고 그 분의 생명을 주셔서 이제 살 수 있게 하셨으니, 자기라고 할 게 뭐가 있는가. 모든 것에 대하여 ‘이것이 그리스도께 무엇이 되는가’가 중요한 판단의 준거고 또한 윤리의 잣대 아닌가.
하지만 항상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습성이 깊이 베어 있는 것이 나인가보다.
사람이 어리다 또는 성숙하다는 척도는 얼마나 자기(自己)가 없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느냐 아닌가. 터무니 없이 어린 나를 본다. 하지만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 아니다.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항상 그를 바라보길 원한다.
“세상의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중요한 것이 기독교는 분명한 하나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 목표는 자기 자신의 성화나 성성이나 자신의 안심입명이나 정신적인 평안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열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자기 자신이 어디로 떨어지든지 자신의 도덕적 향상이나 타락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게 증거되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획이 인류의 역사 위에서 찬연히 늘 빛나게 나타날 것인가 하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목표가 마음에 충만하고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 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3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