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런 경귀를 읽을 때마다 훈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예수님이 자신을 특별히 점 찍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신 것이라면,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버리셨다는 말인가?’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날은 주일이었고 예배 시간에 그런 생각이 또 다시 떠올랐다. 설교 중에 그 성경 말씀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식사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목사님과 마주쳤다.
“예,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세요?”
“나는 잘 지내.”
“저도 별일 없어요… 목사님, 예정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요, 예수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릴 택하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 택했다는 얘긴데, 예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죠?”
“허.. 어려운 고민을 하고 있네. 그건 사실 아무도 잘 모르거야.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런 부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게 좋아.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거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가 믿을지 안 믿을지 미리 아시잖아? 예정론은 그런 뜻라고 생각해. 그리고 기독교는 운명론은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말이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건 안 주셨건 간에 만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지 미리 아신다면, 그건 궁극적으로 운명론과 다를 것이 없잖아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지 나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다른 존재는 미리 알고 있다면 결국 그건 현실적으로 운명론이잖아요. 믿을 사람, 안 믿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다를 것이 없잖아요.”
“와, 대단한데! 그래서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허허… 만일 더 연구하고 싶으면 신학교를 가야겠는걸!”
식사를 기다리는 줄에 밀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촉발된 생각은 바로 멈추지 않았다.
‘그래, 결국 신의 존재 자체가 운명을 만든다. 그런데 성경은 왜 마치 운명은 없고 우리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 하시는 것으로 얘기를 하고 있을까… 운명에 책임이 있는가?’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아직은 그에게 생각의 재료가 충분치 못했고, 무엇보다도 자유의지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바위처럼 그의 마음 속에 있었다. 신의 존재가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는 사실과,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통치 사이를 가늠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