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그 참된 처방
졸업 준비로 한동안 정말 바빴습니다. 지금은 짐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분주하겠고요.
요새는 불안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공부하고 있는 주님의 산상보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개역개정)
이 말씀으로 보건데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것은 곧 오늘 일도 우리가 근심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심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몇 가지 예를 들자면,
-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리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경우가 많죠. 물론 이것은 생각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세가 확고한 사람에겐 오히려 주께서 맡기실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클 것입니다.
- 자신이 저지른 실수 또는 앞으로 잘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때때로 옵니다. 그 이유로는 대개 남들에게 자기 자신이 어떻게 비쳐질까 하는 걱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 역시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부분으로 산다는 사실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염려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형편 없는 사람인지 이미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고, 그런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그를 더욱 지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일부분로서만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이런 것에서도 보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초석이요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곳에 불안과 근심이 있을 곳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일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무수히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하나만 집어서 얘기하자면 결국 사랑이라는 큰 제목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고, 이것에 대하여 요새 많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주님의 말씀처럼 첫째,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어디서 옵니까; 거짓과 음란이 어디서 옵니까? 욕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요? 그럼 욕심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대신에 시선을 자기에게 집중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 자기라는 것은 죄로 오염되고 부패하여 모든 더러움을 내는 것이기에 죽어 없어져야 하는 것이지 썩은 것을 어떻게 잘 고쳐서 쓸 일이 없는 것입니다.
역시 그리스도 만이 해답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은혜를 성신께서 늘 입혀주시사 그 생생한 현실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이며, 상대가 내게 어떠한 즐거움을 줄 것인가가 아닌, 이 관계 가운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