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는 구원의 필연적 결과이지 근거가 아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2, 63, 64 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2–64 문은 우리의 행위와 구원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아래는 독립개신교회 번역본이다):
62문: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 [1].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2].
63문: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상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3], 그래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상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4].
64문: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5]?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
[1] 신 27:26; 갈 3:10 [2] 사 64:6 [3] 마 5:12; 히 11:6 [4] 눅 17:10; 딤후 4:7-8 [5] 롬 3:8 [6] 시 92:12-15; 마 7:18; 눅 6:43-45; 요 15:5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에, 구원의 믿음이 있는데 행위가 없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또한 행위는 구원 받은 자 안에서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시는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아래는 이에 대한 김헌수 목사님의 강설 중 일부분이다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62문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질문합니다. 사람의 선행이 ‘의’가 될 수 없는가, 혹은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는가를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선행을 해서 내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덕적이고 능력이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을 갖춘 사람은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나를 믿어라. 나는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고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니까 나를 믿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한계를 모르는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 걸음 살짝 물러서서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하자. 반반으로 하든지 6:4로 하든지 7:3으로 하든지 하자.’ 어떤 사람은 ‘나는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예수님께서 90% 하시고 나는 10%만 하고, 9:1로 나누자’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되니까 나도 착한 일을 조금이라도 보태야겠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러 갈 때에 깨끗이 씻고 좋은 옷을 입고 가는 것처럼 예수 믿으러 나갈 때에도 착한 일로 이렇게 단장하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선행을 의지하겠다는 사람이나 일부라도 보태겠다는 사람이나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자기를 의지한다는 점에서 같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11주일에서 배운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구주이든지 구주가 아니든지 하는 것이지 ‘절반의 구주’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행을 조금이라도 보태야겠다고 주장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구주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보태겠다고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의 힘으로 살겠다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문자 그대로 오십보백보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엄격히 가르칩니다.
—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2, 224–225 쪽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