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중앙일보의 백성호 기자가 쓴 “정상에 진리가 있다는 … 두 산은 같은 산일까”를 읽고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 여기 다시 올립니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큰 줄기를 간추리자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가지지만 도달 지점은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여기에 동조할 수 없는가? 그 이유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순서로 얘기하자면,
▶ 첫째, 성경은 인간이 산에 오를 능력을 상실했다고 가르친다. 왜 능력을 상실했냐면, 다리를 잃은 것도 아니고 병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산에 오를 수 없다. 병든 사람에게는 “산 꼭대기에 너를 낫게 할 산삼이 있다”는 말이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3)
▶ 둘째, 기독교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여러가지일 수 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 자체가 없다. 인간이 산에 오르려고 개척한 모든 길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선과 악과 미와 추가 범벅이 된 결과를 낳고 만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사 64:6)
▶ 셋째, 하나님의 요구는 산에 오르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오르라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도덕과 선행의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 있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왠만한 기독교인은 바닥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낮은 골짜기도, 높은 산봉우리도, 저 하늘 높이 있는 달나라에 비하면 오십 보 백 보다. 이러한 사실은 수도를 한 사람일 수록 더욱 잘 안다. 그러므로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름이라도 타고 올라가야 한다. 기독교는 그것을 ‘다시 태어남’ 곧 ‘중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개과천선’의 개념이 아니고 사람이 어찌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3)
인간에겐 창조의 능력이 없다. 아기가 스스로 날 수 없는 것 처럼 중생 역시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새로이 창조된 새 사람을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해 나가실 때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자태가 그 사람에게서 조금씩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12: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