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칭의와 부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45 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45 문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질문이다 (아래는 독립개신교회 번역본이다): 45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으심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를 “얻으셨다”는 표현을 썼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것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그 분이 본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살리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의로우심을 인정 받은 “칭의”의 사건인데, 그 분이 돌아가신 것도 우리 죄 때문이지만, 그 분이 의롭다하심을 얻으신 것도 우리 때문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고 장사되시기까지 받으신 고난
우리로서는 영혼과 육신에 관한 문제를 다 알 수 없고, 따라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의 의미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그냥 빼버리지 않고 좀 더 성경적인 표현에 가깝게 생각하면 오히려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으로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고 육신으로 가장 낮은 데까지 내려가신 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함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서 지옥의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실 때까지 지옥의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죄악 가운데 잉태되고 출생한 우리의 죄를 주님의 순결함과 거룩함으로 가려 주셨고, 또한 죄 때문에 무덤에 묻힌 우리를 거기에서 구원하여 주시려고 친히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복지 국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회개하면 용서 받는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를 향한 손봉호 교수의 글을 읽었다. 그 글의 주제와 전체적인 내용에 동감한다. 그런데 읽다가 작은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복음이 지닌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회개하면 용서받고 용서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읽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은 물론 옳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복음의 내용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법’은 우리 보고 무엇을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복음’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말하기 때문이다: 율법: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할 당위 (십계명으로 요약 되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 복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이루신 사실 (하나님께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으셨다는 사실) “복음을 믿으라” 혹은 “회개하라”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변화된다는 사실의 무게
고린도전서 15장 49–5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 그에게 속한 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런 육체를 홀연히 (뜻하지 않은 사이에 갑자기) 입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입으신 그 영광스런 육체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로서 하나님의 절대의 공의 앞에 티나 흠이 하나도 없음을 증거하는데, 그런 육체를 죄 많은 우리가 입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지키신 율법의 공의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장 18–19절)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스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4 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4 문답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으로 부르는 의미에 대한 문답이다. (아래는 독립개신교회 번역본이다.) 34문: 당신은 왜 그분을 “우리 주”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의 보혈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속(救贖)하셨고,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여 주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이에 대한 김헌수 목사님의 강설 중 일부분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1, 361–362 쪽). 하나님과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 그 말이 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종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16세기에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은 노예의 의지를 가졌다. 자유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종의 의지를 가졌다’ 하면서 기독교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김동호 목사의 개혁주의 예정론 비판
개혁교회가 고백한 예정론을 부인한 김동호 목사의 인터뷰를 보았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개혁교회는 소위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을 고백하였는데, 김동호 목사는 단일예정(single predestination)을 지지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보면 그는 원하는 것을 선택할 능력(ability to choose)과 선을 추구하는 능력(moral ability)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고, 또 스스로 구원의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인류 가운데 누구에게 믿음을 줄 것인지 결정하셨다는 것은 누구에게 믿음을 주지 않을 것이지 결정하셨다는 것과 동치임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세부적인 것 보다도 좀 더 거시적인 면에서 그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면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이중예정론이 칼빈주의 대표사상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 말은 옳지만) 그는 여전히 이중예정론을 칼빈이 고안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정론은 성경에 대한 칼빈과 칼빈을 따르는 칼빈주의자들의 이해와…
로마 가톨릭 및 알미니안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부인하는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교회들 역시 예수님을 “주님! 주님!”하고 부르지만, 그들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고 가는 곳이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일까. 만일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라 자처하는 사실은 무서운 일이다. 로마 가톨릭 및 알미니안주의는 사람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전적으로 (exclusively)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에 참여한다던지, 믿음을 계속 유지한다던지, 등등 구원 받고자 하는 쪽에서 만족시켜야 할 어떤 부분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인류가 타락한 이후 각 사람이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께서 홀로 완벽히 만족시키셨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할 뿐 아니라, 우리를 홀로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는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강조는 졸인 추가]: 29문: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救主)라 부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