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묵상

저자: 김홍전

추천 여부: 높이 추천


책 자체에 대한 소감에 앞서 책의 저자인 김홍전 박사님을 알게 된 경위부터 얘기하고 싶다. 그 얘기는 곧 내가 접한 신앙 서적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처음 내게 기독교 지성의 모습을 보여 주신 분은 김진홍 목사님이시다. 그분의 책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본다> 를 고등학교 3학년 때 읽었는데, 그것이 목사님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때다. 그 책을 통해 ‘생각하는 신앙인, 역사 앞에서의 의무를 생각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김진홍 목사님의 많은 저서들을 읽게 되었다.

그 중간에 기독교 신앙/믿음의 본질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박영선 목사님의 강설들을 통해서였다. 우리 집에 늘 있던 것이 <하나님의 열심> 이었다. 그 서문에,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우리와 성정이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모두 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열심히 만들어 내신 작품들이라는 요지를 읽고 독특하다는 생각에 ‘언제 한 번 읽어야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경험을 겪게 되면서 어린 나이에 갖고 있던 생각 “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기려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자존심이 가루와 같이 부서지게 되었다. 그때 마침내 읽게 된 것이 <하나님의 열심>이었고, 결국 “내가 하나님을 믿었으니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며, 나[我]라고 하는 죄인이 얼마나 부패하였으며, 또한 동시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만들어 내신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속성과 신자의 책임 사이를 나는 연결할 수 없었고 그 사이에서 많은 방황을 하였다. 결국 내가 어쩔 수 없이 동조하게 된 것이 자크 엘룰 (물론 그가 영향 받은 것은 바르트인데) 식의 변증론이었다 — 성경의 진리는 모순적으로 나타난다는 발상이다. 지금 생각하면 진리가 모순적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정당하지 못하다. 괜한 철학적 허영에 빠져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그런 생각을 한동안 지니게 되었고, 엘룰의 글들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책임이라는 두 간극이 메워진 것은 아니고 그저 문제를 덮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이 문제가 결국 해결 된 것은 Arthur Pink 목사님의 “The Sovereignity of God“를 읽음으로였다. 이 책에 대한 독후감도 나중에 쓸 계획이다.)

아마도 이 때 나의 동생도 같은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해왔던 것 같다. 아우는 언제부터인가 박영선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남포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것과 그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성경 위에서 풀어내는 것을 박영선 목사님 보다 더 훌륭히 해낸 설교자를 근처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시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맡기면서 성화의 과정엔 인간의 노력을 요하는 듯한 인상을 받은 아우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이론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 왜냐면 우리에겐 죄를 이기고 나갈 능이 없다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기 때문이다 (For I have the desire to do what is right, but not the ability to carry it out. – 롬 7:18). 그런 아우가 존경해 마지 않는 박영선 목사님의 입에서 ‘김홍전 목사님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신학자를 꼽으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 갈 대단한 석학’이라는 얘기를 들었으니, 동생이 자연스럽게 출석하게 된 교회가 김홍전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성약교회다. 그때 내가 아우의 책장에서 처음 본 것이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었다. 그것이 2002년이다.

늘 그렇듯이 서문부터 읽었는데, 어투가 색달라서 그런지 몰라도 무게가 느껴졌다. 솔직히 처음에는 어색했다. 옛날 어른들께서 사용하시던 “성신님”이라는 삼위 하나님께 대한 성호부터가 그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닌 본질의 내용이니, 그러한 것들이 그리 방해되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힘이 있는 언어였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유학을 오던 비행기 안에서였다. 고국을 떠나는 시점에서 마음을 다잡고자 읽었던 것이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서 말씀을 전하는 종 넘어 계신 하나님을 조금씩 묵상하게 되었다. 나의 마음과 눈을 덮고 있던 껍질이 하나 더 벗겨지면서 조금 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크심과 비류없이 높으심을 더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분은 단순히 그분의 말씀을 잘 따르면 복을 내리시고, 안 따르면 벌을 주시는, 여느 종교에서도 능히 생각해낼 수 있는 그런 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분은 마귀와 더불어 싸우시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귀도 그분 앞에서는 일개 종에 불과한 피조물이다. 그분, 그 지극히 거룩하신 분은 천하 만물, 아니, 온 우주와 그 모든 것이 감히 담을 수 없이 광대하신 분이시며, 우주를 운행하시고, 역사를 이루어가시며, 통치하시고 심판을 행하시며 구속하시는 그분은, 절대의 대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 위의 왕, 主 하나님이셨다.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사 45:6-7)

내 신앙관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바로잡아야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로 역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바로 생각해야 했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개인이 얼마나 거룩해지는 것이라라고 생각했던 것도 고쳐야 했다. 이 책 중에서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구절을 꼽으라면 다음이다:

성경이 참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면서 요구하신 바는 ‘네가 네 자신을 중심 삼아서 네 자신의 행복 증진과 네 자신의 향상이나 네 자신의 무엇을 늘 생각하는 그 세계에서 떠나서 나의 자식으로 거하는 세계로 들어와야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를 증가시키고 자기를 행복스럽게 하고 자기의 고통을 덜어야 하고 자기를 고귀하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경계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 하나님만을 전부로 의지하고 자기가 도무지 없다는 큰 사실이 기저적(基底的)으로 명확해졌느냐 하는 것이 항상 기본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 pp.26–27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자아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은 역사적인 개혁 신앙을 처음 배워 나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인이 그분과 그분께서 내리신 여러 은혜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찌 짚어보고 싶으신 분들께는 일독을 권하고 싶다.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은 건너 뛰더라도 남은 부분만으로도 묵상할 재료가 감당하기 벅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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