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의로움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고, 구원은 그분의 자비에만 기인하며, 모든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고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할 차례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무엇이 선인고 악인지 말들을 많이 하지만, 기반 없는 이론일 뿐이다. 사도는 우리 도덕의 기반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1절: 사도의 권면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구원이 사람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기인할 때만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유일하고도 큰 동기를 부여 받는다.
But this exhortation teaches us, that until men really apprehend how much they owe to the mercy of God, they will never with a right feeling worship him, nor be effectually stimulated to fear and obey him. It is enough for the Papists, if they can extort by terror some sort of forced obedience, I know not what. But Paul, that he might bind us to God, not by servile fear, but by the voluntary and cheerful love of righteousness, allures us by the sweetness of that favor, by which our salvation is effected; and at the same time he reproaches us with ingratitude, except we, after having found a Father so kind and bountiful, do strive in our turn to dedicate ourselves wholly to him. […] Where then are they who think that all exhortations to a holy life are nullified, if the salvation of men depends on the grace of God alone, since by no precepts, by no sanctions, is a pious mind so framed to render obedience to God, as by a serious meditation on the Divine goodness towards it? —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우리는 주의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구별되고 선한) “살아있는” 제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예배를 드리지 않고 우리 멋대로 자행자지 하는 것은 주의 것을 더럽히는 죄가 아닐 수 없다.
2절: 개역개정에 ‘마음’이라고 번역된 ‘νοός’는 사람의 이성적이고 지적인 판단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로 영어로 mind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 말 역시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생각’과 관련된 기능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연인의 이성 역시 하나님의 성신으로 새롭게 함을 받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사도의 가르침이다.
[Reason] is imagined to be a most wise queen. But Paul pulls her down from her throne, and so reduces her to nothing by teaching us that we must be renewed in mind. For how much soever we may flatter ourselves, that declaration of Christ is still true, — that every man must be born again, who would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for in mind and heart we are altogether alienated from the righteousness of God. —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3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에서의 “믿음”을 에베소서 4장 7절의 “은혜”와 비슷한 의미로 읽는다면 각 사람에게 맡기신 직분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아래 이어지는 4–8절 내용과도 부합된다. 어쨌든 본 절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참된 지식과 진리에 관한 것도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주께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과 가르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4–5절: 기독교 도덕의 최종 목표는 개인 인격의 완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앞서 읽은 3절과 연결시켜 보라 — 각 지체에게는 다른 지체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맡기신 일 이상으로 다른 사람의 일까지 하려는 것은 불가능 할뿐더러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합하셨으니 성실함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일이다.
6절: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즉, 각 지체가 다른 지체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설계요 뜻이다. 겸손이 다시금 요청되는 부분이다.
6절에서 언급된 ‘예언’은 ‘미리 예(豫)’가 아닌 ‘맡길 예(預)’를 사용했다. 예언자라는 말의 히브리어 נביא 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한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한다’는 의미로 성경에서 주로 사용 되었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우리 시점에서는 후자의 의미, 곧 성경의 말씀을 연구하고 해명한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믿음의 분수대로”에서 “분수대로”라고 번역된 ἀναλογία라는 단어는 “걸맞게” 혹은 “부합되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곧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서 (유다서 1:3) 거기에 부합되는 예언을 한다는 것은 자기 개인의 사견을 섞지 않고 교회에 주신 역사적인 신앙과 잘 부합되는지 잘 살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도덕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을 위한 것임을 위에서 밝혔으니, 이제 구체적으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9절: 개역개정의 번역은 조금 부족한 면이 있다. 다음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꾸밈이 없도록 하세요. 악행을 미워하고 선한 행실에 붙어 있으세요.”
10절: ‘우애’라고 번역된 스토르게(στοργὴν)는 혈족애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의 지체에게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자연스런 사랑이 흘러야 함을 볼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런 사랑은 “존중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곧 겸손이 기저에 항상 자리잡고 있다.
11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것은 여러면에서 적용되어야 하겠지만, 지금 문맥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형제를 돌아보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By adding fervent in spirit, he shows how we are to attain the former; for our flesh, like the ass, is always torpid, and has therefore need of goals; and it is only the fervency of the Spirit that can correct our slothfulness. Hence diligence in doing good requires that zeal which the Spirit of God kindles in our hearts. Why then, some one may say, does Paul exhort us to cultivate this fervency? To this I answer, — that though it be the gift of God, it is yet a duty enjoined the faithful to shake off sloth, and to cherish the flame kindled by heaven, as it for the most part happens, that the Spirit is suppressed and extinguished through our fault. —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2절: 11절에서 말한 바 열심으로 주를 섬기는 자는 앞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에 소망을 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즐거워 하며 또한 환난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항상 기도에 힘쓸 일이다.
13절: 사랑은 갚을 능력이 없는 자에게 베풀 때 진정 사랑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본 절에서는 먼저 성도들을 살필 것을 가르치고 있다. 개역개정에 ‘공급’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κοινωνέω(코이노니오) 곧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통을 의미한다; 내 몸을 돌보는 것으로 여기고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손 대접”에서 ‘손’은 나그네를 의미한다.
16절: 참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 조차 피해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Here then is condemned all ambition and that elation of mind which insinuates itself under the name of magnanimity; for the chief virtue of the faithful is moderation, or rather lowliness of mind, which ever prefers to give honor to others, rather than to take it away from them. —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8절: 무조건 화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거든”이다 — 즉 화목하기 어려운 때도 있단. 두 가지 만 지적하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 받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되며 (요한복음 15:19), 또한 불의와 타협할 수 없다 (고린도후서 6:14).
19절: 겸손한 자는 스스로 자신을 심판자의 위치에 두어 복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을 믿고 다 맡기는 것이다. 그 분이 꼭 복수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믿고 전부를 맡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