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1절: “위에 있는 권세”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자. 군대에서 처럼 명령 체계가 어떻게 서 있는지 따지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부모, 선생, 정부 등 다양하게 “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위치에 놓은 것이 하나님이심을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을 명령할 때도 순종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묻지만 그것에 대한 답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예를 들어 5절), 지금 사도는 다스리는 자가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 등 세세한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대전제로서 권세자들을 두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된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 권세를 하나님의 법에 맞게 행사하는 것은 권세자의 의무요,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권세 아래 있는 자의 의무다.
3-4절: 1-2절에서 권세는 근본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는 것을 말했으니, 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권세들을 통해 원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악을 벌하고 선을 장려하는 도구로 삼으심이다. 포악한 권세일지라도 사회가 무법 천지가 되는 것을 장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평과 정의를 성실히 세우는 것이 권세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지고 있는 ‘의무’라는 것을 본 말씀에서 배울 수 있다.
5절: “양심을 따라” 즉, 이상의 사실들을 아는 자 답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권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미 1-4절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듯이 권세들에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저해는 권세, 양심의 자유를 저해하는 권세들은 복종할 수가 없는 것이다.
6절: 얼마나 조세를 바쳐야하는지가 논의의 중심은 아니다. 하지만 왜 조세가 필요한지는 배울 수 있다. 권세를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을 세우신 뜻을 받들어 공평과 정의를 세우기 위해 조세를 요구하고 또 써야 하는 것이다.
7절: 1-6절에서 이야기한 것의 요약이다. 하나님께서 위에 두신 자들이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환으로 위에 있는 자들을 따라야 한다.
8–9절: 여기서 사도가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원칙들이지만, 사랑의 “빚”을 7절의 “줄 것을 주되”와 동떨어진 것으로 읽는다면 문맥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즉 권세자들에 대한 앞에서의 1–7절의 가르침과 8–9절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7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권세들에 복종할 것을 가르쳤다면, 8–9절에서는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참으로 이웃들에게 공평과 정의가 서 있는 사회를 제공하기 위해 나 부터 권세에 따라야지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율법 전체를 이루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십계명에서 1–4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이웃을 향한 계명이다. 과연 9절에서 사도는 십계명의 후반부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과 선지자의 두 강령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물론 두 강령이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 곧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10절: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한 전체 문맥에 비춰 본 절을 다시 생각하자면 이웃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권세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해 공평과 정의를 세워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러한 질서와 안녕을 이웃에게 마련해주는 심정에서 우리는 또한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은 위의 8–9절에서 설명했듯이 율법의 두 강령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 생각해 하는 것이다.
11–12절: 11절의 “이 시기”(the time)의 그리스어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χρόνος)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시기, 기회, 때, 곧 καιρὸς이다. 낮이 “가까웠으니”(ἐγγίζω)라는 표현으로 볼 때 “낮”이라 함은 장차 올 영화를 가리키고 “밤”은 캄캄한 이 세상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잠”이라는 것은 무감각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풀어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영혼에 동이 트고 여명이 밝은 것과 같으니 깨어서 낮을 향한 사람들 답게 행하라”고 읽을 수 있다. 아직 대낮이 임한 것은 아니나, 밤은 지나고 낮에 들어간 것이기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13절)고 하는 것이다. 요한 1서 3장 2-3절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13절: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 곧 칭의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전체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 칭의에 관한 것은 로마서 1–4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지금은 우리의 행실과 성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신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는 로마서 8장 초반에 이야기하였다.
육신의 소욕은 ‘옛 사람의 소욕’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가 죄로 부패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육체의 욕구에 지지눌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으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