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1절: 개역개정에는 “비판”하지 말라고 번역한 “διακρίσεις διαλογισμῶν”는 둘 다 복수형으로서 “논쟁”하지 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논쟁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사도가 뒤에 가서 더 설명하지만, 지금 문장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논쟁으로 인해 오히려 믿음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Notwithstanding the authority vested by Christ in his Apostles, and their infallibility in delivering his doctrine to mankind, differences of opinion prevailed even among real Christians; nor did St. Paul, by an express decision and command, attempt to put a final termination to them. A proposition indeed may be certain and important truth; yet a man cannot receive it without due preparation of mind and heart; — so that a compelled assent to any doctrine, or conformity to any outward observances, without conviction, would in general be hypocrisy, and entirely unavailing. So essential are the rights and existence of private judgment, in all possible cases, to the exercise of true religion! and so useless an encumbrance would an infallible judge be, for deciding controversies, and producing unanimity among Christians!

— Scott (on Romans 14:1)

2절: 그 당시 육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부류는 (기독교인 여부를 떠나) 여러가지다; 유대인들 중에는 고기의 출처가 불분명하니 율법에서 금한 고기를 먹을까 하여 채식을 한 사람들이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채식과 유사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에세네 파 사람들도 육식을 하지 않았다; 이방인 중에서는 고기를 먹으면 짐승의 영혼이 들어온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않았다.

3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들이다; 그를 내가 마음으로 배척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강한 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잘못은 남을 업신 여기는 것이며, 약한 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잘못은 자기 이해의 수준에서 남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다”는 부연 설명을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에만 국한 시켜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꼭 그렇게 읽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4절: “남의 하인”을 비판하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잣대로 가지고 남의 하인을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남의 하인은 그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는지 여부만 보면 되는 것이지 내 의견과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어떤 의사를 우리가 품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내 소견을 가지고 형제를 비판하지 말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할 중요한 이유가 또 있으니 그것은 “주의 권능”으로 “그가 세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받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고 “받으리니”라 하였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장된 이 소망이 있으니 항상 형제들을 자비와 선함으로 대할 것을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5절: 개역개정의 번역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확정’이라고 번역된 동사 πληροφορέω는 로마서 4장 21절에도 등장하는 단어로서 ‘확신이 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마다 확신 가운데 행할지니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 “Each one should be fully convinced in his own mind.” (ESV 번역) 이는 각 사람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어지는 6절에 잘 나타나듯이 신자는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확신 위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확신 없이 어떤 날을 특별하게 여긴다던지 아니면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의 가르침과 확신 없이 자행자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래 8절 참조).

And this ought to be thoroughly borne in mind, that it is the first principle of a right conduct, that men should be dependent on the will of God, and never allow themselves to move even a finger, while the mind is doubtful and vacillating;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6절: 이 말씀을 읽고 날을 같게 여기던 다르게 여기던 상관 없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비슷한 비교가 3절에 있지만 그것이 믿음의 장성 정도에 따른 것일 수도 있음을 2절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을 특별히 여기는 문제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종종 발견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에게는 어려서부터 늘 지켜온 절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절기들이 신약의 교회에서는 더 나은 것으로 대체 되어 지켜질 필요가 없지만, 평생 몸 담아온 문화와 생활 방식을 떨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절기들을 지키는 것 자체가 무슨 죄는 아니라는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약의 교회에 주신 절기들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그 사람 속에서 분명한 각성이 있기 전에 (5절에서 설명했듯이) 확신도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냥 따른 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 약하면 약한 만큼, 강하면 강한 만큼, 그 주신 믿음에 근거하여 주를 의지하며 행하는 것이 칭찬 받을 만한 일이요 감사의 생활이지, 확신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른다던지 아니면 그냥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은 결코 주를 섬기는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물론 다른 사람의 말도 무시하고 뭐든지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것은 아니다.

7–8절: 이것은 너무도 숭고한 말씀이다. 참으로 이러하려면 위의 5절에 대하여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확신 없이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23절 참조)

And thus we are not only forbidden rashly to attempt this or that without God’s command, but we are also commanded to be patient under all troubles and losses.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9절: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갈라놓지 못하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셨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살리셨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영원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를 위해서 살아야 함이 마땅하다.

10–12절: 심판의 권세는 주께만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다는 9절 말씀과 연계해서 읽으면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이 증명 됨을 볼 수 있다.


13절: 개역개정에서 “비판”, “주의”라고 번역된 말은 둘 다 동사 ‘κρίνω’이다. 본 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나타날 수 있는 다른 생활 방식들이다. (어떤 형제가 범죄할 때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랬을 때 나와 다른 방식을 지닌 형제를 죄짓는 것이라고 ‘정죄’하는 월권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전자의 ‘κρίνω’이고,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핏값으로 형제에게 주신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지 나 자신을 ‘분별’하는 것이 마땅하는 것이 후자의 ‘κρίνω’이다. 돌려 말하자면 ‘분별력이 있다면 형제들을 정죄하기 하기 보다 네 자신이 형제들에게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되지는 않는지 살피라’는 뜻이리라. 이는 믿음이 약한 자나 강한 자 모두에게 해당 되는 명령이다.

14절: 고기 자체가 선하고 악할 이유가 없다. 물질에는 도덕성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평범한 물질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예를 들어,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사용하려고 구별해 놓았다면 그것을 구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질 자체의 속성이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것을 부모를 위해 쓰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존재하는 것이다. 혹은 어떤 특정 음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안 먹기로 하나님께 서약했다면, 그 음식을 취하는 것은 자신에게 부정한 일이 되지만, 음식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사도가 하는 말은, 그러므로 네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음식은 없으니 만큼 음식보다는 도리어 형제들에게 마음을 쓰고, 음식을 구별하여 먹던 구별 없이 먹던 주께서 형제들에게 주신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시각을 칼빈의 주석에서 읽을 수 있는데, 칼빈 선생의 성경을 읽는 깊은 눈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7절의 가르침에서 다시 확인 되는 바이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읽으며 율법과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미 로마서 6, 7장에서 공부한 바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것은 실정법으로서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는 뜻이지, 율법이 가르치는 바 (율법의 교육적 기능) 하나님의 영원법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등등) 자재하며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15절: “망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파괴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서 마치 “내가” 형제로 하여금 구원을 잃게 만들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지나친 해석이다. (그럴 것 같으면 20절에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을 읽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론을 펼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은 정당하지 못한 논리이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능은 주께 있다.

16절: “선한 것”이라고 번역한 ἀγαθός는 여기서 ‘선하게/좋게/옳게 여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신자에게 주신 자유를 가리킨다.

17절: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외형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데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칼빈 선생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읽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아니하므로 형제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못 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칼빈 선생의 성경을 읽는 깊은 눈을 다시 한 번 본다. 아래 20절과 일맥상통한다.

성신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한 것은 이 기쁨 혹은 즐거움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낸다고 칼빈은 또한 이야기한다 —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자의 기쁨이다. 세상은 이런 저런 기쁨에 대해 이야기들을 하지만, 양심 깊은 곳에서 자리잡은 나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는 한 그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18절: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것은 사람이 보았을 때도 칭찬할만한 것들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판단하는 사람의 판단력이 바를 때를 가정하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은 바른 판단력을 잃고 바른 것을 보고도 시기와 비방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26)


19절: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겠다는 핑계 아래 분란을 일이키는 경우가 있다. 본 말씀에서 “화평”을 힘쓰라 한 것을 명심할 일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린도전서 10:23)

20절: 17절 참조.

22절: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네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 과시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14장 전체의 문맥, 특히 1–3절에 비춰봤을 때, 믿음이 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낸다는 미명 아래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21절 참조).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대강령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함부로 휘두른 결과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이 곧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23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신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런 믿음 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이요, 곧 죄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기를 먹는 자유를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형제에게 먹을 것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 형제를 죄악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은 항상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그것은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2) 믿음을 주시는 성신을 의지하여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내가 고안한 신념을 따른다는 것도 죄악이지만, 성신을 의지한 분명한 확신 없이 외형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역시 죄악이다. 우리는 어리석음과 암매함으로 멋대로 자행자지할 때가 태반이지만, 그것은 참으로 못된 짓임을 알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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