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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즐거워 하기에 그분의 계명을 지킴
싱클레어 퍼거슨 (Sinclair Ferguson) 목사는 율법주의의 본질을 하나님의 인격 혹은 인품을 그분의 계명과 분리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Legalism is simply separating the law of God from the person of God.” — Sinclair Ferguson 하나님의 계명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서려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에게는 그분의 성품이 묻어난다. 그런 자기 모습을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연인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즐거워 하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율법주의와 반법주의는 동전의 양면 처럼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반법주의는 율법에 서려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절하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절하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 그 자체 혹은 그로써 내가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유신론적 진화론의 모순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말인데, 진화론은 신의 존재를 요구하지도 않거니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더 잘 맞는 특정한 종류의 진화론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진화론”이라는 말의 뜻을 분명히 하자. 통상적으로 진화론이라고 하면 신다윈주의 (neo-Darwinism)에 입각한 진화론을 말한다. 거기에서 말하는 “진화”란, 스스로 유신론적 진화론자라고 여긴 르콘테(LeConte)에 따르면, ‘자연에 내재하는 힘에 의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의 연속’을 말한다.1 그러한 진화의 체제(mechanism)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신다윈주의에 입각한 진화론이며, 그것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진화론일 뿐만 아니라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론이다. 여기에는 무신론자들을 위한 진화론과 유신론자들을 위한 진화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신론자에게든 유신론자에게든 진화론은 동일한 진화론이다. 그 동일한 진화론을 놓고 무신론자는 무신론의 강력한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분명히 해야…
우리의 삶은 복음이 아니다 (Why You Can’t Be The Gospel)
신자는 복음을 믿는 자이고, 신자의 삶은 그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복음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약을 먹고 치료 받은 사람이 자기의 생활이 약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우리가 약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앞뒤가 안맞는 소리이다. 어불성설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활하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우리 삶이 복음이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흐리거나 진짜 복음인 그리스도께 누가 되기 때문이다. 천하 인간 중 아무도 “날 보고 그리스도를 배우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다. 그런 교만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화가 진행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흠 없는 의(義) 앞에서는 누더기 걸레와 같고 지옥의 영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날마다 회개하고 노력하는 것을 본받으라”고…
기독교는 사람의 열심으로 움직이는 종교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헌금에 대해서 가르치기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고 말씀했습니다. 가령 내가 돈을 백 원만 드리고 싶었는데 천 원짜리를 드리면서 ‘아, 이렇게 천 원을 드려서 좀 아깝다’ 하는 생각이 난다면, 그런 인색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많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가 아니고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입니다. 여러분이 돈을 십 원이라도 즐겁게 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지만, 만 원을 내더라도 만일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아이고, 너무 많지만 그대로 내야겠다. 한 오천 원만 내면 적당하겠지만 돈을 뗄 것도 없고 에이, 만 원 낸다’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돈 십 원이라도 즐겁게 ‘하나님이여, 이것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드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너희가 권능을 받은 다음에 할 일은 내 증인 노릇 하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낸 것뿐 아니라 결국 수난을 당하고 영광을 얻고 그리고 너희와 이야기하고 승천한 데까지의 일과 너희들에게 부탁하는 일, 이런 것들을 너희는 가서 증인 노릇 하면서 증언해라.’ 증인이 되는데 두 가지 방면에서 증인이 됩니다. 첫째는 증언이라는 방면에서 증인 노릇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증언을 하려면 증언할 내용이 있어야 하고 증언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증언할 내용이 있고 상대에게 증거가 될 만큼 논리를 세워서 잘 발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언을 해야 할 기회가 그에게 와야 합니다. 아무 기회도 없으면 증언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어서 증인이 되지만,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은 증언자입니다. 둘째로, 여기에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가
지난 3월 30일 주일 강설은 요한 1서 2장 24-29절에 대하여였고, 주제는 “Abiding in Christ”(그리스도 안에 거함)이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설 녹음 연결 고리) 요한1서를 읽어 나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서두부터 사도 요한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빛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마땅함을 이야기했다. 그 내용을 읽고 있노라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의 중요성을 충분히 느끼다 못해 그렇다면 ‘어떻게 그 교제 가운데 거하는가?’라는 질문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을 사도 요한은 이제 2장 24절에서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주의 말씀을 간직하는 자의 모습을 잘 그린 것이 시편 119편이다.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이를 위해 서로 권면하고 또 시편을 부를 것을 권하고 있다. 사람은…
바티칸에서 눈으로 보고 배우는 로마 가톨릭(천주교)의 정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이 “주교들의 일치는 물론 신자 대중이 이루는 일치의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라고 믿을 것으로 요구한다. 다시 말해 하나된 보편 교회가 갖고 있는 연합의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으로서 교황이 있다고 믿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을 수장으로한 교도권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고 구성된다. 교황청이 위치한 바티칸을 방문해보면 그 사실이 매우 뚜렷하고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이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