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교회를 정할 때 고려할 것들: 참 교회의 외적 표징
8월 중순입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들이 새로운 학년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할 때입니다. 신입생들의 이주가 가장 활발한 때이기도 하지요. 가정과 멀리 떨어지게 된 학생들의 경우, 특히 기독교인일 경우, 새로운 곳에서 적절한 교회를 찾는 것이 고민일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 보다는 개신교인이 더 그러할 것입니다.) 저 역시 유학을 막 왔을 때 그랬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실 분들에게 생각의 재료를 드리고자 하는 심정으로 지난 날 제가 배운 것들을 돌이켜 보며 몇 가지 고려할 것들을 적어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3,16 1. 교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림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런던에서 열리는 30회 올림픽이 몇 시간 앞으로 다가 왔다. 많은 나라에서 온 대표 선수들이 자신들의 국가적 명예와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경기를 펼치게 된다. 온 세계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왕권 아래 있음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잔치로 여겨지는 이 행사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전에도 올린 적이 있지만, 고재수(Gootjes) 교수 목사님의 글을 읽어볼만 하다.
전병욱 목사의 교회 개척 소식을 접하며
여신도들을 성추행 했다는 고발로 인해 2010년 삼일교회 목사직을 사임했던 전병욱 씨 — 그가 교회를 (가칭 홍대 새교회) 개척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고국의 교계는 다시 한 번 시끄럽다. 이 사건을 둘러싼 여러가지 것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것은 고국 교회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큰 결핍과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1) 전병욱 씨의 타락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사도 바울이 신자들을 탄압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왜 내 신도들을 핍박하느냐고 묻지 아니하시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전병욱 씨는 그저 몇몇 신도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죄를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그의 회복 역시 교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그가 훼손한 것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회복을 힘쓸 것인지 마땅히 교회의 장로들에게 묻고…
뉴스앤조이의 사회복음주의적 논조
뉴스앤조이의 이메일을 오래동안 받아보았다. 그 결과 이 신문의 논조가 상당히 사회복음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복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글을 보면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 목회자 납세에 대한 논조나, 아나뱁티스트를 오늘날 교회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소개하는 논조들을 보면 다분히 사회복음주의적 논조를 띠고 있다. 뉴스앤조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 보기에 옳은 일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온전한 복음에서 벗어나면 ‘착하게 살기’ 운동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이런데서 또 확인하게 된다.
복음을 대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현대 기독 교회의 연맹
중세 유럽의 수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 신도들이었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믿는 이는 드물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는 지금도 그 때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개신교라고 불리는 교회들은 어떤가? 그 가운데서도 복음을 온전히 가르치는 곳이 드물다. 온전한 복음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결코 복음의 일부가 아니다. 그래서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그 성업을 우리는 신뢰할 뿐이다. 우리의 그 믿음이라는 것 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효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 혹은 수단이 될 뿐이지 그리스도의 공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거나 우리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온전한 복음을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개신교회 가운데서도 듣기가 쉽지…
만 원을 에누리하면 사기꾼이지만, 진리를 에누리하면 타인을 배려함인가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 그런 문제라면 논쟁할 것도 없고, 설령 논쟁하더라도 백 번이면 백 번 다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안이 중대해질수록 타협의 여지는 줄어든다. 정부가 자녀 출산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한가? 이것은 짜장면과 짬뽕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과는 그 중차대함에 있어 전혀 다르다.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라면 어떻겠는가? 나 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내 자식, 아니, 온 인류에게 적용 되는 영원한 생명의 문제라면 어떻겠는가? 그 보다 더 중요한, 혹은 논쟁할 가치가 있는, 혹은 싸울 가치가 있는 문제가 있는가? 하지만 돈 1 만 원을 에누리하면 사기꾼이라 욕해도, 영원한 생명이 걸린 진리를 에누리하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례는 하나다 (유아세례와 성인세례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음)
언약신학의 기본적인 내용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언약의 확실함을 알리시는 방도 중 하나로 눈에 보이는 예식들을 제정하셨다. 이러한 성례전(聖禮典)들은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언약의 표(表, sign)가 된다. 그 표가 상징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인(印, seal)으로서도 작용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할례와 유월절 만찬이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성례전이었다. 할례는 입문 (enterance) 예식이고, 유월절은 새롭게 (renewal) 하는 예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할례와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하신 것이 세례와 성찬이다. 구약과 신약의 구분은 언약을 성취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후의 시기적 구분이지, 두 개의 다른 언약을 믿은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언약을 믿는 하나의 언약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할례, 유월절, 세례, 성찬 모두 동일한 언약의 성례전들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성례전 시행에 있어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어도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