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문답: 질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아래는 김헌수 목사님의 에서 발췌: ‘조용한 밤에 자기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혹은 ‘자기의 양심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경험이나 양심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율법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생의 경험과 양심으로 비참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판단을 내리는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판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판단합니다. 자기는 잘못을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으면 자기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을 낮춥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자기를 판단하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성이 잘못된 방법을 보완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도리를 붙잡고 아무리 각고면려한다 해도 하나님께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완고함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큰 가르침 중 하나이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 사무엘 선지자가 전해 준 말씀이다. 이 큰 도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람들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는 사람의 경우, 진정성만 있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 바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가납하시고 승인하신 방법과 길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겨 주시느냐 말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마태복음 7:22에 나오는 질문의 성격과 유사하다. 내가 아는…
가정과 하나님 나라의 소명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사회가 가정인데, 죄가 들어와서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 김헌수, “두 가지 가정 예배“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느끼는 것은 사회가 안정된 가정에 터를 두기 보다는 직장과 돈(맘몬)에 터를 잡고 일어서려고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아이는 사회가 맡아서 길러줄테니 어찌해서든 부모를 일터로 불러내려고 한다. 실상 가정에서 바른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 보다는 자기가 찾은, 자기가 더 보람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우선을 두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그런다고 해서 언약의 백성들 조차 거기에 휩쓸려 가서는 안 된다.
남녀평등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
누가복음 8장 1–3절에는 예수님께 공궤를 하며 사역을 돕던 여인들이 기록되어있다. 그 기록을 보면 그들의 남편이 (혹 있다면)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느냐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지 않다. 이 여인들은 남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는 이 여인들이 그 분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돕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확대해석하여 직분에 남녀의 구분이 없다고, 예를 들어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역할 구분이 없다고 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유업으로 받는 일에 있어서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접근은 뭐든지 피상적으로 제도를 통해 고치려는 현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접근법이자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Technology and Information: The New Sacred [기술과 정보: 새로운 신성불가침]
So much obsession with “growth, expansion of knowledge, new technology, more scientific workers,” etc. Technology and Information, as Ellul pointed out, is now the new sacred. (“How dare you question the goodness of the advancement of technology?”) People say ‘we need to do something about the gender population difference in STEM area’ so that we may have ‘adequate supply of scientific workers’. (Sigh…) Yes, we need technicians, engineers, and scientists, but why? Knowledge for knowledge sake? That’s just lust for knowledge. 현대 사회는 “성장, 지식 증가, 기술 발전, 과학 노동자 증대”에 혼이 팔려 있는 것 같다. 기술과 정보는, 엘룰이 지적했듯이, 새로운 신성불가침이다. (“어찌 감히 기술 발전의 대의에 의문을 표하는가?”) ‘과학기술…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얻으라?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개미가 사람에게 와서 “아… 일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배웠을텐데, 이제는 사람이 개미한테 가서 지혜를 얻어야 할 만큼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타락시켰다. (잠언 6장 강설 중 기억나는 한 대목.)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속한 자들을 새롭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영광과 지혜와 권세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린도전서 6:2–3]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 (고린도전서 2:9) 하였다. 우리를 어떠한 영광스런 위치에 옮겨 놓으셨는지에 대한 생각과 믿음이 희미해질 때, 우리는 개가…
예정과 종말을 상고하는 유익 (히브리서 12:18–29)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천당과 지옥이라는 상벌을 놓고 종교행위를 강요한다고 오해하나,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할 하나님의 택하심을 ‘이미 받은 자’라고 가르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믿기만 하면 앞으로 뭔짓을 해도 천당간다 가르친다고 오해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삶을 위한 가장 큰 동기가 됨을 가르쳐준다. 이것이 예정과 종말을 상고하는 유익 중 하나이다. 히브리서 12장 18–29절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