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방도 | Means of Grace

  • 찬송 | Praise

    시편 찬송

    처음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을 때 조금 낯설었던 것은 시편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런 것에서 사람이 자라나온 문화와 배경이라는 것이 참 단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약 2 년이 지난 지금, 시편 찬송을 대하는 내 마음은 많이 달라졌다. (이런 것에서 사람이 몸 담고 있는 문화와 배경의 위력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제는 오히려 예배 때 시편으로 찬송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찬송가들의 감화와 감동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음악성만 따지자면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시편 곡들은 조금 투박하게 느껴지는 것이 많이 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시편의 내용들을 곱씹어 가며 찬송으로 불러보았을 때 비로소 느끼는 시편의 그 비류 없는 독특성이 있다는 것 뿐이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높으심이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

  • 구원 | Salvation,  기도 | Prayer

    죄의 추악함

    사람 속에 있는 죄의 추악함을 느낀다. 가르침과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죄성이 분출될 기회와 가능성이 적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죄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인 군자일수록 자신을 반성하고 매일 참회록을 쓴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에 퍼져있는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죄악들을 볼 때 그러한 죄악의 근원이 내 마음 속에도 있다는 것과, 또 때를 따라서 그것이 정도만 약할 뿐 미약하게 발산되는 것을 확인한다. 그럴 때 인류의 커다란 죄악 가운데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무고한 살인과 학살이라는 극악한 죄악도 결국 미움과 탐욕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열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 안에 있는 작은 미움 작은 탐심이 얼마나 더럽고 썩은 것인지 느끼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 눈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조금이나마 느끼는 것이다…

  • 기도 | Prayer,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사람의 부패한 정도

    juwana 님의 블로그에서 글을 읽다가 다음 구절을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가 아무 일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평안하기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 아닌가 하는 뜻이다. 이 말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닐찌라도, 혹 우리가 기도할 때의 무의식적인 심정이 ‘하나님을 좀 찾지 않아도 되는 무사안일함을 주십시오’하는 때가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무서운일이다. 이처럼 인간은 거룩한 것을 가지고서도 패악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부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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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 | Prayer

    기도는 은혜의 방편

    양태진 님의 블로그에 가면 VeldeKamp의 “Dreams and Dictators”를 읽어 가며 쓰신 다니엘서 6장에 대한 묵상이 있다. 거기서 나누고 있듯이 다니엘은 한 달간 기도를 금하는 령을 접했을 때 그는 “감사하며” 늘 하던대로 여전히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 기도를 하였다. 그에게는 ‘기도하는 자는 죽인다’는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이 더 두려웠으며 사실 기도를 그만 둔다는 것이 이미 죽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증인인가! 사실 다니엘을 공격하기 위해 적들은 한 달 동안 기도를 금지할 필요도 없었다; 하루면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기도 없이 지내기가 하루가 뭔말인가. 하나님의 나라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말씀, 예배, 찬송, 기도, 성례전, 헌상이라는 여섯 가지 통로를 마련하셨다. 그것을 무시하고서라도 그 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밥을 먹고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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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성경 | Bible

    예수님 영화

    난 예수님을 그린 영화가 좋지 않다. 사실, 피하고 싶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모습을 심어주기 보다는 자꾸 방해만 한다. 그와는 달리 복음서를 읽으면서 성신님이 비춰 주시는 예수님의 자태를 볼 때면 그저 감히 입을 열 수가 없다. 요한 사도의 고백 처럼 그저 “은혜 위에 은혜”다 — 통회와 감동, 경이, 경외. (그래서 4 복음서가 정경으로 채택이 되었겠지만.) 주님의 엄위와 권위와 인자 앞에, 나의 추악함은 드러나고, 자꾸만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분은 맡아 주실 것임을 느낀다. 간혹, 예수님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은 얼마나 복될까 생각들기도 하지만, 놀라운 성신님의 은혜로 말씀 가운데 그분의 아름다운 자태가 나에게 비출 때면, 정말 그분을 더욱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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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 Bible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목적 중 하나

    “성경이 참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면서 요구하신 바는 ‘네가 네 자신을 중심 삼아서 네 자신의 행복 증진과 네 자신의 향상이나 네 자신의 무엇을 늘 생각하는 그 세계에서 떠나서 나의 자식으로 거하는 세계로 들어와야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를 증가시키고 자기를 행복스럽게 하고 자기의 고통을 덜어야 하고 자기를 고귀하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경계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 하나님만을 전부로 의지하고 자기가 도무지 없다는 큰 사실이 기저적(基底的)으로 명확해졌느냐 하는 것이 항상 기본적인 일입니다.” — 김홍전, <하나님에 대한 묵상> 아직도 내가 가진 그 무엇을 발휘해야 한다는 단단한 바위가 내 마음 속에 있을 때,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던 김홍전 목사님의 강설. 그 뒤로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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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 Bible,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차례 차례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안 뒤 이제부터 그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심오한 도리들이 논리도 없고 그저 이런 저런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감상들로 묶여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첫 반응은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이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노력으로 불가능 하며, 전적으로 성신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로마서 8:14에 나타난 바, “성신님, 주장(αγω)하고 가 주시옵소서” 하고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주께 맡겼으니 이루실 줄 믿고 안도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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