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 Gospel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음
현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표현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다. 하지만 자신이 인지하던 못하던 사람이라고 하는 인격적 존재는 인격신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실상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어떤 언약적 관계를 갖고 있는가이다.
삼계탕이 올라온 원인 (그리고 우리의 구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인설(四因說)+수단원인을 삼계탕을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우리 구원의 다섯 가지 원인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를 가지고 율법주의와 반법주의가 범하는 오류를 분명하게 밝힌다.
칭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참된 성화로 이끈다
내가 수사(修士)였던 시절에는 내 자신이 철저하게 버림 받은 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는데, 곧 내 육신의 정욕을 감지할 때 그랬습니다. 즉 그 어떤 악한 활동이라도, 혹은 육체적 정욕, 격노, 증오, 또는 어떤 형제를 향한 시샘 등이 활동하는 것을 느낄 때였습니다. 내 양심의 가책을 달래고 잠재우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육신의 색욕과 정욕이 항상 재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쉴 수가 없었고,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끊임 없이 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네가 저지른 이 죄 또는 저 죄로 보건데 너는 시샘, 성급함, 그리고 기타 다른 죄악으로 오염 되어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 거룩한 수도회에 가입한 것은 헛된 일이고, 너의 모든 선행도 무익하다.’ 그때 만일 내가 바울의 다음 문장들을 바르게…
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 – 후기
김성수 목사가 개척했다고 하는 서울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가면 김성수 목사가 북미주개혁장로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의 목사였다고 적어놓고 또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설교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래서 김성수 목사가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충실한 목사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글에서도 지적했듯 김성수 목사는 구원과 율법에 대한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과 가르침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잘 알려진 반법주의의 그것이다.
반법주의(antinomianism)의 예: 서머나 교회 김성수
올해 초 본 블로그에서는 김세윤 교수의 가르침 속의 율법주의의 한 양상을 살필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반법주의의 한 양상을 살피고자 하는데, 서머나 교회의 (故)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을 놓고 보고자 한다. 율법주의와 반법주의는 마치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과 당신의 법을 훼손한다는 점에서는 배 다른 형제와 같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요한1서 3:1-3)
요한1서 2장 24-29절을 놓고 에서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가를 배웠다. 요한1서 3장 1-3절과 함께하는 이번 강설에서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원하도록 만드는지 상고한다. (강설 녹음 연결 고리)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이끄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비류 없는 사랑이다 (1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그 사랑은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가 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위치로 옮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는 호세아 1:10의 말씀을 이루신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은 복음이 아니다 (Why You Can’t Be The Gospel)
신자는 복음을 믿는 자이고, 신자의 삶은 그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복음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약을 먹고 치료 받은 사람이 자기의 생활이 약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우리가 약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앞뒤가 안맞는 소리이다. 어불성설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활하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우리 삶이 복음이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흐리거나 진짜 복음인 그리스도께 누가 되기 때문이다. 천하 인간 중 아무도 “날 보고 그리스도를 배우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다. 그런 교만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화가 진행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흠 없는 의(義) 앞에서는 누더기 걸레와 같고 지옥의 영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날마다 회개하고 노력하는 것을 본받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