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 Salvation

  •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아저씨의 웃음

    소년이 알던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의 입가에는 늘 웃음이 있었는데, 마을에 가끔 오는 서커스 광대의 분장이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광대와는 달리 사탕을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저씨가 떠나던 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골목길에서 아저씨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뭔가 잔뜩 언짢은 말투들이었다. 조금 떨어져 쭈그려 앉아 들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얘기는 꼬리를 물었다. 광대의 웃음이 좋은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아저씨와 친하지는 않았지만만, 마주치면 인사를 꼬박 드리고 또 아저씨도 아는 체 해주었다. 한 번은 여름에 아저씨가 막걸리 한 주전자 사 오라고 시켰다. 막걸리를 들고 오니 아저씨는 먹던 감자 하나를 주었다. 아저씨는 “니가 먹는 감자가 얼마짜린지 아냐?” 하였다. 감자를 그리 안 좋아하던 소년에겐 어른의 술주정으로 들렸다. 말은 이어졌다,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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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 | Salvation,  신학 | Theology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중앙일보의 백성호 기자가 쓴 “정상에 진리가 있다는 … 두 산은 같은 산일까”를 읽고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 여기 다시 올립니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큰 줄기를 간추리자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가지지만 도달 지점은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여기에 동조할 수 없는가? 그 이유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순서로 얘기하자면, ▶ 첫째, 성경은 인간이 산에 오를 능력을 상실했다고 가르친다. 왜 능력을 상실했냐면, 다리를 잃은 것도 아니고 병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산에 오를 수 없다. 병든 사람에게는 “산 꼭대기에 너를 낫게 할 산삼이 있다”는 말이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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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믿음의 평범함

    신령한 사람의 상태란 열정으로 가득차서 의심, 고민, 유혹도 없이 어떤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 나가는 상태라고 상상하며 알게 모르게 그러한 것을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반 년 가까이 예수님의 행적을 공부하면서, 또 요새 교회에서 듣는 욥기 강설과, 그리고 나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이 겪는 번민들을 보면서, 믿음의 행보라는 것은 요란법석한 것이 아니며 무슨 위대한 꿈을 꾸거나 종교 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때론 우시고 또 고민하시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시며 땀 흘려 이 땅 위를 걸으셨던 것 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한 것임을 이제사 조금 느끼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해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해야 제대로 한 것 같고, 찬송을 해도 감격에 겨워 눈물이 눈 앞을 가려야 제대로 부른 것 같고, 예배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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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idelberg 성신교회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구원 | Salvation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당연한 말이지만 ‘최근의 것’이 ‘향상된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학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학문의 귀납적 특성 때문에 항상 새로운 것을 쫓는 습관을 들이기가 쉽니다. 현대에 미친 과학의 영향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사회에 많이 퍼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심지어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성경과 관련된 종교의 역사 속에서 주옥과 같이 빛나는 열매가 있다면 나는 그 옛날 (까마득히 먼 옛날은 아니지만) 기록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단연 꼽고 싶다. 로마교회의 무서운 권력이 유럽에 뻗쳐 있던 그 때, 다음 첫 문답을 적어내려간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를 생각하며 읽노라면 무거운 감명이 가슴 깊이 퍼진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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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 | Salvation,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내가 아닌 그리스도

    요새 교회에서 저녁 예배 때는 욥기가 강설되고 있다. 아직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을 보고 있다. 그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부분적으로 옳은 얘기도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릇된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가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이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생사화복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세 친구들을 탓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는 아직 계시의 초반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세상이야 윤리를 가르쳐도 나 개인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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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 | Salvation

    교리에 대한 믿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과 관련된 교리들을 믿는다는 것 보다 예수님 당신을 믿는 것이란 이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바른 교리를 믿는 것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보다 예전엔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제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은 부분들도 나온다. 요 근래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후의 이야기가(마 17장) 강설되었다. 거기 보면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결국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는데,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하고 묻는다. 이것은 자기의 영력(靈力)에 대한 의문던지 또는 자기네가 예수님을 본 그대로 흉내냈는데 왜 안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 신앙을 이러한 식으로 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제자들의 이 질문을 나의 질문이라 생각했을 때,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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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 Gospel

    회개하고 또 죄를 지를 것을 아시고 용서하심

    어제 주일 예배 말씀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조건 없는 사랑, 저에겐 그것이 정말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노라면 너무도 결점과 죄악 투성이라서, 아무래도 하나님의 본심은 “참 꼴도 보기 싫지만 ‘언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한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 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저를 반기시리라 느껴집니다. 아마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온 그녀는 그 심정을 알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그녀를 비난하는 군중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주님은 그녀 앞에 계십니다. 제가 그녀였다면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 이제 올 것이 왔다… 우려하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죄를 짓는 현장에서 걸려 주님과 맞닥뜨렸다… 무어라 하실까…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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