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 Salvation
사람은 누구나 종이다 (로마서 6:15-23)
오늘 교회 예배에서는 로마서 6장 15-23절에 대한 강설이 있었다. 인상에 남은 몇 가지를 적어 보려고 한다. 안 그래도 근래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종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스도와 나의 주종관계, 비록 머리로는 알아도 그렇게 가슴 깊이 뿌리 내리지는 못했다. 내가 누군가의 종이라는 것, 현대인들에게 그리 인기 있는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한다 — 사람은 누구나 종으로 태어난다고 (본문 17절). 우리 시조 할아버지 아담이 마귀의 생각에 순종한 결과로 자연인은 본래 죄의 종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값을 치루어 죄의 종된 위치에서 빼어내어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은 자이다 (고전 6:19-20, 7:23 참조).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종이고, 문제는 누구를 주인으로 모셨느냐일 뿐이다. 본문 16절과 19절에 있는…
아들이 우리를 영접할 때 (마태복음 17장 변화산 변모 사건)
쉐키나 구름이 임하는 두려운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님 집안의 종들(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났다. 단지 이전과 다른 것 있다면, 이번에는 친아드님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영접해준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부정한 자들을 영접하기 위해 아들은 부정을 만져서 자기의 것으로 삼았는데,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음
현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표현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다. 하지만 자신이 인지하던 못하던 사람이라고 하는 인격적 존재는 인격신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실상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어떤 언약적 관계를 갖고 있는가이다.
삼계탕이 올라온 원인 (그리고 우리의 구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인설(四因說)+수단원인을 삼계탕을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우리 구원의 다섯 가지 원인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를 가지고 율법주의와 반법주의가 범하는 오류를 분명하게 밝힌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와의 관계가 영구히 부서졌다 (요한1서 5:18)
교회에서 한동안 계속되었던 요한1서 강해 중 5장 18절에 관한 강설이다: Triple Break with Sin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한 말씀은 얼핏 보면 해석하기 어려운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헬라어 번역의 문제이다. 글 전체 속에서 봤을 때 그리스도인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님이 분명한 것은 같은 요한1서 2장 1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범죄 가능성을 기정 사실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가르침 또한 잘못된 것이다.) “범죄하지” 않는다 하였을 때 “범죄한다”(ἁμαρτάνει)는 표현은 현재 진행형으로서, ‘현재 벌어지는 일로서 앞으로 변함 없이 계속될 기세’를 묘사한다. 그래서 요한1서 5:18 앞 부분을 다시 번역해 보자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거듭나기 이전에 죄를 짓던 생활…
칭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참된 성화로 이끈다
내가 수사(修士)였던 시절에는 내 자신이 철저하게 버림 받은 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는데, 곧 내 육신의 정욕을 감지할 때 그랬습니다. 즉 그 어떤 악한 활동이라도, 혹은 육체적 정욕, 격노, 증오, 또는 어떤 형제를 향한 시샘 등이 활동하는 것을 느낄 때였습니다. 내 양심의 가책을 달래고 잠재우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육신의 색욕과 정욕이 항상 재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쉴 수가 없었고,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끊임 없이 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네가 저지른 이 죄 또는 저 죄로 보건데 너는 시샘, 성급함, 그리고 기타 다른 죄악으로 오염 되어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 거룩한 수도회에 가입한 것은 헛된 일이고, 너의 모든 선행도 무익하다.’ 그때 만일 내가 바울의 다음 문장들을 바르게…
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 – 후기
김성수 목사가 개척했다고 하는 서울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가면 김성수 목사가 북미주개혁장로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의 목사였다고 적어놓고 또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설교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래서 김성수 목사가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충실한 목사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글에서도 지적했듯 김성수 목사는 구원과 율법에 대한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과 가르침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잘 알려진 반법주의의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