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영적인 성장은 바른 이성의 사용을 동반한다
사람의 인격을 편의상 지적, 정적, 의지적 요소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성신께서는 우리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데, 한국인의 정서상 신앙의 정적이고 의지적 요소를 균형에 어긋날 정도로 강조하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지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 나머지 변론을 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리에 대한 이해에서 뒤쳐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는 않으십니다. Brothers, do not be children in your thinking. Be infants in evil, but in your thinking be mature. (1Corinthians 14:20)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회, 직장, 가정, 어디에서든 내가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시 68:19)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저 나는 성신께서 주장하사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나타나길 바래야 함을 배우다.
제 9 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요약하고 있는 십계명의 제 아홉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고 되어있다. 정직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계명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어떤 기자가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거짓말하신 적 있으십니까?” 물론 대답은 모두 “네”이다.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였는데, 대부분 머뭇거리다가 “평범한 사람” 또는 “그냥 사람이요” 정도였다. 기자가 이번에는 질문을 바꾸어 “제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시겠습니까?”라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거짓말장이”라는 대답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 21:8 정직은 세상 윤리에서도 강조 되는 것인데,…
아저씨의 웃음
소년이 알던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의 입가에는 늘 웃음이 있었는데, 마을에 가끔 오는 서커스 광대의 분장이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광대와는 달리 사탕을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저씨가 떠나던 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골목길에서 아저씨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뭔가 잔뜩 언짢은 말투들이었다. 조금 떨어져 쭈그려 앉아 들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얘기는 꼬리를 물었다. 광대의 웃음이 좋은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아저씨와 친하지는 않았지만만, 마주치면 인사를 꼬박 드리고 또 아저씨도 아는 체 해주었다. 한 번은 여름에 아저씨가 막걸리 한 주전자 사 오라고 시켰다. 막걸리를 들고 오니 아저씨는 먹던 감자 하나를 주었다. 아저씨는 “니가 먹는 감자가 얼마짜린지 아냐?” 하였다. 감자를 그리 안 좋아하던 소년에겐 어른의 술주정으로 들렸다. 말은 이어졌다, “세상…
믿음의 평범함
신령한 사람의 상태란 열정으로 가득차서 의심, 고민, 유혹도 없이 어떤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 나가는 상태라고 상상하며 알게 모르게 그러한 것을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반 년 가까이 예수님의 행적을 공부하면서, 또 요새 교회에서 듣는 욥기 강설과, 그리고 나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이 겪는 번민들을 보면서, 믿음의 행보라는 것은 요란법석한 것이 아니며 무슨 위대한 꿈을 꾸거나 종교 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때론 우시고 또 고민하시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시며 땀 흘려 이 땅 위를 걸으셨던 것 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한 것임을 이제사 조금 느끼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해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해야 제대로 한 것 같고, 찬송을 해도 감격에 겨워 눈물이 눈 앞을 가려야 제대로 부른 것 같고, 예배를 해도…
내가 아닌 그리스도
요새 교회에서 저녁 예배 때는 욥기가 강설되고 있다. 아직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을 보고 있다. 그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부분적으로 옳은 얘기도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릇된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가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이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생사화복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세 친구들을 탓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는 아직 계시의 초반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세상이야 윤리를 가르쳐도 나 개인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가에…
부르심 (Calling)
피조된 것 중에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한 것은 교회이다.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일 중에 가장 거룩하고 아름답고 소중하며 희망적인 것은 참 교회가 뚜렷이 서 나가는 것이다. 그 분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준엄한 부르심을 느낀다. 부르신 보람을 만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