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하나님께로 난 믿음
마라톤 맨 님의 블로그에 은혜의 방도로서의 믿음을 지적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일부분이 올라와 있다. “the faith that was once for all delivered to the saints” (유다서 1:3)의 말씀이 가르치듯이 믿음 역시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성도가 발휘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마련하셨고 사람이 믿음으로 그것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인 것이다 — 즉 인간에게서 아무 조건을 찾지 않으시고 “선물” 처럼 주신 것이다. 우리가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고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실증된다.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is not your own doing; it is the gift of God,” (엡 2:8) 앞 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생활이란 자기의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동원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거듭난 사람의 생활 자태
하나님의 자녀가 장성하는 자태는 말씀이 들어가면 성신님이 그 말씀을 쓰셔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각오와 각성이 있게 하셔서 그가 ‘아,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하려 해도 그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 힘으로도 못하고 능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만 하는 것이다”(슥 4:6)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신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신님을 의지하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로 내가 “아니요” 하고 반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하고 거룩한 자태와 하나님 자식다운 자태를 생활 가운데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나 혹은 세상의 도덕이 하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느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한 사람이 중생하였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요 10:28). 이 새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은 그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골 3:4)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중생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실의 한 가지입니다. 중생한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더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 여기에서 너희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식으로 나를 사랑하지 말고 별다른 식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부모나 처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연장해서 더 열렬하게 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내가 부모, 형제, 친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열정은 피해만 드릴 뿐
마라톤맨 님의 블로그에서 글을 읽다가 다음의 칼빈 인용을 보았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 그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보면 얼마나, 얼마나 어리석고 형편없고 암매하며 저속한 나의 생각 아래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고, 또한 그러한 나의 열심을 비록 불완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여삐 받아주시리라고 생각했던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아무 쓸모 없는 나
존 오웬 목사님의 고백이 구구절절이 나의 얘기다. 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쓸모 없는 것이다. 심지어 나의 회개라고 하는 것도, 나의 다짐이라는 것도, 전부 소용 없고 오히려 그러했기 때문에 훗날 나의 배신의 죄를 더하는 것이다. 너무도 비참한 상태 가운데 있다. 도무지 해답이 없다, 그리스도 외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지혜와 진리와 은혜의 충만을 본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혜 만을 바라보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 내신 보람을 만들어 주시옵소서.
나는 죽어야 한다
나는 완벽히 죽어야만 한다. 내게서는 도무지 희망이나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 오직 나는 썩었으며 더 썩어질 것 그것임을 본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하고 다짐 해보지만 나는 그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 내가 하루라도 더 살고 있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에는 피해를 끼치는 것이고 오직 그 나라에 피해를 안 끼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것이다.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이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시고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그것인 이 죄인을 사랑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영원한 생명을 심어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나마 이 죄인을 살려두실 유일한 기대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새 생명을 내게서 드러나게 해 주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살아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이 복음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인도
시간 속에서 어떠한 일을 이룰 가능성이 보이는 것,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앞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의 방법이 분명하지만, 보이는 가능성이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시는 길은 아니다. 그리고 때론 나는 가능성을 보고 전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것을 막지 아니하시고 결국 벽에 부딪히게 하심으로써 중요한 교훈과 함께 그것이 길이 아님을 가르치시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주께서 어떤 길로도 인도하시는지 알 수 없을 때 보이는 하나의 가능성을 향해 주를 사랑하는 심정에서, 그리고 주를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분변치 못하고 앞에 보이는 가능성을 무작정 좇아 가기가 쉽고 때론 거기에 교묘한 이유를 붙여 정당화 하기도 한다. 특히 젊으면 젊을수록, 자기가 선택하고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참으로 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