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하나님을 두려워 함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다르다고 —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은 엄격하신 분이시나 신약에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 생각하기가 쉬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베드로 앞에서 거짓을 말하였다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행 5장), 주님의 성찬을 분별없이 대하였다가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었다 (고전 11장). 일일이 이런 것들을 나열하는 것이 필요할까; 구/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엄위로우사 한 호리도 남김 없이 토죄하시며, 또한 한 없는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해서 우리는 얼마나 그 분을 업수이 여기는가? 사람 사이에도 존숭히 여김을 받아야 할 분에게 합당한 공경과 예를 다 하지 않는 것은 죄이거늘, 하물며 도무지 감히 상상할 수 없이 높으신 그 분께 대한 우리의 죄는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와 도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도덕은 결코 개인의 완성을 추구하지 않음
여기서 우리가 중요히 생각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선하라든지 의로우라든지 진실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요컨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각고면려하고 노력해서 의나 선이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가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의 종교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의 종교도 정통이나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라 할 때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경계냐 하면 성경은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스스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사람의 본질적인 부패와 타락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이것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저것밖에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롬 7:19 참조) 그런고로 아무리…
흑암의 권세와 사랑의 아드님의 나라 중 지금 어디에 있는가
천지의 대주재로서 절대권을 행사하시는 주 하나님 앞에 만물은 마땅히 무릎을 꿇고 복종해야 할 종이다. 사람은 그런 하나님께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과 경외심으로 섬길 수 있는 영광을 허락 받았으나 아담은 범죄함으로 죄 아래 팔려 우리 모두는 죄의 종이 되었다. 그 결과는 너무도 비참한 것 — 곧,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다 (롬 8: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크신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구속하시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옮기사 (행 26:18)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 높은 자리로 우리를 끌어올려주셨다. 곧,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사랑의 아드님의 나라로” 옮기신 것이다 (골 1:13). 그 나라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뤄지는 나라요 (행 8:2-4),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나라다.…
인생의 경영자는 사람이 아니다
삶은 짧다. 특히 주위에 형 누나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젊은 시절 청춘의 경쾌한 웃음을 날리던 그들의 입 가에 중년의 중후한 미소가 서서히 나타나려고 하는 것을 보니 참 시간이란 유수와 같이 흐르고 사람의 삶이 짧은 것임을 느낀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4)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는 자꾸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것 처럼 생각하거나 자기가 주께 무슨 소용이라도 되는 것 처럼 스스로를 인정하기가 일수이다. 또 우리 주위에는 청년의 젊은 혈기를 이용하여 그들로 스스로 자행자지하도록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룩한 꿈을 꾸라면서 말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실 때 중요한 문제로 드신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배고픈 것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무시하고 자기의 지혜를 믿고 신통력을 발휘해서 미리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나누어서 하나님께도 드리고 다른 것에게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큰 글자라는 사실이야 말로 예수님이 항상 가장 강한 근거로서 유지하려 했던 명확하고 찬연하게 비치는 보루와 요새였습니다. 예수님은 늘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 김홍전,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
하나님 나라의 이 땅에서의 증시
나의 의지 약함이 다행스러운 것은 그로써 오직 의지할 분은 하나님 뿐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가 강해 뜻한 바를 이루는 사람이었다면 내게 있는 그 무엇을 인정하는 큰 교만 가운데 빠졌을 것이다. 버러지 만도 못하고 영벌에 처해져도 부족한 죄인을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을 뿐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 — 시편 107 中 그리스도께서 먼저 찾아와…
그리스도인과 아상(我相)
사람은 항상 자기가 무엇이 된 것 같이 생각하기가 쉽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든지 자기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그 바탕 위에서 무엇을 주장해 나가기 쉽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또 의지해서도 안된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 만이 전부인 심정, 예수님 만을 믿는 그 신앙. 그것 외엔 모든 것이 쭉정이와 같은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 참 안식이 있다. 거기에 참 안식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 부드럽고, 자비와 인자가 가득한 예수님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