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 Theology
자기 백성 대신 세례를 받고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님
세례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주라고 명하신 세례와 그 의미가 같지 않다. 여기서 자세히 세례의 의미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니, 사도행전 19장 3-5절에 나온 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는 정도만 기억하면 좋겠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마태복음 3:11; 21:25 참조) 그 당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 것을 요한이 선뜻 이해하지 못함이 이상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신 분이시기에,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를 받아야 할 죄도 없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친히 불 곧 성신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마태복음 3:11).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행위언약에 대한 교리를 이단시하는 것의 위험
교의학에 관한 제이슨 반 블릿 (Jason Van Vliet) 교수의 저서가 <복음 안에서 자라가기>라는 제목으로 성약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것을 읽고 있다. 제 1권 11장은 ‘언약’이 주제인데, ‘행위의 언약'(Covenant of Works)라는 용어에 대해 부정적이고, 심지어 그 언약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불확실하다는 인상을 글에서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표준은 행위언약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그 고백이 바르다고 믿는 나로서는 반 블릿 교수의 설명이 흡족하지 않았다. 행위언약에 대해 반 블릿 교수가 언급하길 꺼리는 것은 그가 속한 캐나다 개혁교회(CanRC)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캐나다 개혁교회는 네덜란드의 해방파 개혁교회 신도들의 이민을 통해 설립되었고, 해방파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스킬더인데, 스킬더는 행위언약을 언급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스킬더가 행위언약을 부정한 이유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스킬더가 걱정한 것 가운데 하나는 카이퍼 학파의…
[BST.1.1.I] 신학의 계통적 제시에 붙여진 이름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계시를 하셨다. 성경은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또한 가르친다. 먼저 계시의 내용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체계를 이루고 있기에 계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한 공부를 지칭하는 말로 종교개혁 이후로 독일 및 네덜란드 쪽에서는 우리말로 교의학에 해당하는 ‘도그마틱’이란 표현이 주로 쓰였다. 미국쪽에서는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시스테메틱 티올로지’가 더 보편화 되었다. 각 표현에 장단점이 있다. 교의학이라는 표현은 학문의 범위를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학문은 조직적이지 않다는 오해를 피한다는 점에서 장점이고, 그래서 버코프는 그것을 선호하는 듯하다. 하지만 워필드(B. Warfield)는 조직신학이란 표현을 선호한다. 어떤 표현을 쓰던, 본 학문의 정당한 원칙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 교재를 작성한 버코프는 결국 조직신학이라는 표현을 택했다
[BST.0] 버코프 조직신학: 서문
루이스 버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 교재가 1930년대에 초간되었을 때는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다. 제 1권은 조직신학의 서론(prolegomenon)으로서 조직신학 자체에 대한 기본을 다루었으며, 제 2권에서 조직신학의 세부 내용을 다룬다. 그러다가 1996년에 개정 합권본이 나왔는데 (제 1권 개정증보판, 제 2권 4차 개정증보판), 그 서문은 칼빈신학교의 리처드 멀러(Richard A. Muller)가 썼다. 이 합권본을 읽어 나가면서 인상에 남거나 기억하고 싶은 내용, 혹은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을 이곳에 기회와 여력이 닿는대로 남기려고 한다. 오늘은 서론을 읽었다. 신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신학은 철학의 제분야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리를 놓고 연역하거나 추론하는 학문도 아니다. 성경을 인식의 토대(principium cognocendi)로 하여 성경이 계시하는 바를 배우고 거기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 인식의 정수(principium essendi)는 다른 아닌 하나님 당신이시다.…
존 파이퍼: 믿음 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가 오직 믿음 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의 게시물을 그의 선교단체 Desiring God 웹사이트를 통해 올린 것이 지난 2017년 9월 25일입니다. 평소에 개혁주의 구원론에 가까운 설교를 하여서 “개혁주의적 침례교”(Reformed Baptist)라는 수식어가 그에게 종종 부여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 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결코 개혁신앙이 아닙니다. 그의 주장은 차라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것과 가깝습니다. 존 파이퍼의 2단계 구원론 파이퍼의 게시물을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칭의(justification)과 최후구원(final salvation)의 2단계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아래는 그의 게시물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칭의의 경우, 믿음을 통해, 우리를 떠나 그리스도가 완수한 공로를 받아 우리의 것으로 인정 받는 것이며 그 공로를 전가받는 것입니다. […] 최후 심판 때 받는 최종 구원의 경우, 믿음이…
그리스도를 알아감 (Knowing Christ)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는 나의 구주(救主)다’ 하여 생각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며, 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고, 천상천하 모든 것이 — 보이든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왕이든 권력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 다 그를 통해, 또 그를 위해서 존재하며, 그에 의해 유지 된다 (골 1:15-17). 그는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 가운데로 넣은 아담과는 달리 자신의 순종으로 얻은 의(義)와 생명을 그에게 속한 모든 자에게 준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이삭이 죽지…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
사람은 자범죄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든지 보는 죄들입니다. 신문에서도 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당하는 죄들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것들을 아주 여러 곳에서 뚜렷이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한 군데 더 보면, 마태복음 15:19-20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범죄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후에 자기가 배워서 하는 것들입니다. 또 야고보서 1:14-15에도 보면, 이런 자범죄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