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 Theology

  • 구원 | Salvation,  신학 | Theology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중앙일보의 백성호 기자가 쓴 “정상에 진리가 있다는 … 두 산은 같은 산일까”를 읽고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 여기 다시 올립니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큰 줄기를 간추리자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가지지만 도달 지점은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여기에 동조할 수 없는가? 그 이유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순서로 얘기하자면, ▶ 첫째, 성경은 인간이 산에 오를 능력을 상실했다고 가르친다. 왜 능력을 상실했냐면, 다리를 잃은 것도 아니고 병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산에 오를 수 없다. 병든 사람에게는 “산 꼭대기에 너를 낫게 할 산삼이 있다”는 말이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3)…

    Comments Off on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 신학 | Theology

    성경에 나타난 신(神)개념은 진화하였는가

    성경을 비판하는 부류 중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조시키면서 신(神)개념이 무자비하고 엄한 히브리 민족신의 모습에서 사랑이 많고 포용력 있는 전인류를 위한 신 모습으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 몇 가지만 되돌아보려고 한다. (1) 아브라함의 기록 자주 등장하는 예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기록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신 것일까? 아직 여러모로 인류 문화가 현대에 비해서 미개하였던 그 당시의 아브라함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음직 하다. 그 때엔 다른 종교들 가운데 인신제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도 그런 제사를 원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바로 이러한 오해를 고쳐주시기 위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려 하자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고 엄히…

    Comments Off on 성경에 나타난 신(神)개념은 진화하였는가
  • 신학 | Theology

    그 날과 그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하신 이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이 신비로운 글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에 대하여 적고 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 예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같은 본문 14절). 이와 관련하여 종종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은, 그럼 어째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느냐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24:36 즉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어째서 아버지는 아시지만 자신은 모르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가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한 것과 서로 상충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것은 근거 있는 질문인데—다만, 그 근거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자태에 대한 오해 위에 있을 뿐이다.…

    Comments Off on 그 날과 그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하신 이유
  • 신학 | Theology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 이단설

    요새 교회 성경공부 시간에 삼위일체에 대하여 상고할 기회를 가졌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써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이 다 감싸안을 수 없는 신비이다. 우리 주위의 그 어떤 비유도 불완전하며 차라리 방해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 인격으로 나타나시지만, 하나님은 결코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그러나 한 분이 세 분인 것 처럼 행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 럼 왜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교리를 기독교는 갖고 있는가—물론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위일체가 결코 모순이 아닌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형체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본질적’이란 말은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육체는 따로 논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삼위일체의 중요성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와 연결하여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와 관련된 이단설이 이미 기독교…

    Comments Off on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 이단설
  • 신학 | Theology

    믿음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라는 의미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김홍전 著) 을 읽던 중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는 말씀에 대한 강설을 읽다가 하늘에 속한 믿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믿음은 분명 평범한 믿음 — 예를 들면 ‘나는 내가 지금 걸린 이 불치병에서 나을 것을 믿는다’는 그런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것에 그러한 믿음을 적용하거나 발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믿음은 궁극적으로 공리적인 것으로서, 세상 사람들도 ‘조국의 무궁한 발전을 믿는다’거나 ‘사랑의 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이 숭고한 믿음을 갖고 그 믿음 위에서 자신의 생활을 전개해 나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믿은은 하늘에 속한 믿음이 분명합니다.…

    Comments Off on 믿음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라는 의미
  • 구원 | Salvation,  복음 | Gospel,  신학 | Theology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란 사실과 제한속죄는 모순인가

    이 글에서는 ‘제한속죄’와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이라는 명제가 왜 모순이 아닌지 추적하려고 한다. (1) 제한속죄의 의미를 돌아봄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14-15,27-29) 그리스도께서는 성부(聖父)께서 그에게 주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고, 그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위하신 양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개혁자들이 제한구속(limited redemption)이라는 제목으로 이름 붙인 내용의 핵심이다. 다시…

    Comments Off on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란 사실과 제한속죄는 모순인가
  • 구원 | Salvation,  복음 | Gospel,  신학 | Theology

    기독교는 나약한 자를 위한 종교인가

    종교를 갖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엔 그 이유로서 종교는 나약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기 위해 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는 것은,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은 절대의 대권으로 통치하시는 대주재시라는 사실이다; 그 분은 내가 어떻게 감히 어르거나 달랠 수 없는 분이시며, 그런 것을 보시는 분도 아니시다; 영원전부터 선하신 뜻을 따라 작정하신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이루어 나가시는 절대의 통치권자이시다; 그 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왜”라고 물을 자 누구랴; 무슨 공포 영화에 나오듯이 귀신들이 하나님께 거역하지 못한다; 천지만물 모든 피조물이 그 분의 통치 앞에 복종할 뿐이다. 더 두려운 것은 절대의 공의로 다스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각 사람의 무한한 죄 값이…

    Comments Off on 기독교는 나약한 자를 위한 종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