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 Theology
좋은 DVD 소개
개혁신앙이란 무엇인가? 칼빈주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로봇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죄를 만드신 분으로 만드는가? 자유의지는 어찌되는 것인가? 교회가 칼빈주의를 받아들이면 전도가 수그러들거나 아니면 멈추게 되는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사람의 책임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역사적 개혁신학과 극단적칼빈주의(hyper-Calvinism)는 어떻게 다른가? 왜 어거스틴, 루터, 칼빈, 스펄전, 휫필드, 에드워즈 등 수많은 전도자들이 알미니안적인 자유의지를 부인하고 그것을 이단이라고 하였는가 (아래 덧글 참조)? 왜 로마 가톨릭은 예정과 택정의 개혁주의를 정죄하고 자유의지의 신학을 받아들였는가? 어째서 오늘날의 수많은 개신교도들은 이 문제에 있어 로마 교회와 동의하는가? 역사적 개혁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룬 DVD가 나와서 보려고 한다. 맛보기로 몇 부분을 봤는데 훌륭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to deny Calvinism is to deny the gospel of Jesus Christ.” — C. H. Spurgeon…
“운명”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런 경귀를 읽을 때마다 훈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예수님이 자신을 특별히 점 찍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신 것이라면,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버리셨다는 말인가?’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날은 주일이었고 예배 시간에 그런 생각이 또 다시 떠올랐다. 설교 중에 그 성경 말씀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식사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목사님과 마주쳤다. “예,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세요?” “나는 잘 지내.” “저도 별일 없어요… 목사님, 예정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요, 예수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릴 택하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 택했다는 얘긴데,…
신절을 지킴
도덕적인 책임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인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순결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위치에 확고히 서 있고, 거기서 일보도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 개인의 덕성으로 비춰 볼 때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절개, 즉 신절(信節)에 해당합니다. 그 절개를 훼절(毁節)하게끔 위협하는 가혹한 시련과 핍박과 환난이 임할 때, 이 싸움은 자기가 죽어서 끝난다 하고서 끝까지 타협치 않는 이런 것들이 절개요 정절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어린양의 신부들을 가리켜 “흰옷을 입은 정절이 있는 자들이라”고 하여 이렇게 정절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기본적인 도덕적인 상태요 속성으로서, 거룩하다고 할 때는 신절이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中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창조주, 구주, 주 혹은 왕이라는 칭호로 표현합니다. 창조주라고 할 때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구주라고 할 때는 구원받은 죄인의 입장에서, 주리고 할 때는 종의 입장에서, 왕이라고 할 때는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이와 아울러 또 한 가지 보편적으로 쓰는 표현은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그것은 성부, 성자, 성신 가운데 성부의 위(位)만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대해서 보편적으로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에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실 때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켜 하신 것이지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하실 때는 반드시 성부께 대한 칭호인 것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칭호로서 쓰시는 경우가…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
그러면 ‘독처’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미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서 세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 곧 부부의 합일에서 비로소 구현됩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 및 복수성은 아담이라는 한 개체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까닭에, 반드시 하나 이상, 그러나 동시에 그게 하나가 될 수 있는 다른 개체를 요구했습니다. 둘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움직이심의 여러 양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사람의 정신 생활, 혹은 영혼의 여러 기능의 움직임 가운데 만일 한 인격만 있었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그 양태를 모방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독서를 위한 조언
백금산, “책읽는 방법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부흥과 개혁사)에서 유익한 부분 발췌: “책을 읽는 데는 대개 방법이 있다.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읽어도 되지만 만일 백성이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반드시 문단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참구해 가면서 읽어야 하며 한낮의 졸음이나 쫓는 태도로 읽어서는 안된다.” — 다산 정약용 “스무권의 책을 대충 대충, 곧 강아지가 나일강 물먹듯이 읽는 것보다는 한권의 책을 통달하는 편이 정신적인 체격에 휠씬 더 깊은 영향을 미친다.” “성경에는 완벽한 도서실이 들어있다.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통째로 삼킨 학자보다 더 낫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야망이어야 한다. 성경의 전체 흐름, 각 책의 내용, 상세한 역사, 교리, 교훈, 성경에 담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방식
그러나 우리 주님이 어떤 사람을 붙들고 말씀을 하실 때는, 그사람의 의표(意表) 이외의, 그가 생각한 이외의 전연 딴것을 가지고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사람과 이야기하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은 전연 생각지도 않고 준비도 안 된 것을 문제로 내놓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야기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모처럼 시간을 얻어서 또한 그만한 기회를 타서 예수님께 나와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니고데모한테, 그가 전연 생각지도 않고 꿈도 안 꾼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마치 “너 이런 것도 모르느냐?” 하고서는 공격을 하듯이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거나 사람을 다루거나 대하실 때 그런 방법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자비롭고 따듯하게, 항상 가장 이해를 많이 하시는 분으로서 하십니다. 가장 이해를 많이 하시는 분으로서 니고데모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