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신학 | Theology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1세기 동안 발전되었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에서 시작되었고, 그 대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지요1; 즉 우리 각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을 맛보시고 죽으셨으나 그 의로움으로 부활하사 천상천하의 대권을 쥐고 지금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 또는 기독관(그리스도란 어떤 분인가?)은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 중엔 이러한 성경의 기독관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약 몇 십년 동안 서서히 발전되어 정립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약 50일이 지난 시점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사도행전 2장)를 읽어보면 아주 처음 부터 그 사상 가운데 예수님의 속죄와 메시아적 왕권이 우뚝 서있습니다. 게다가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보더라도 처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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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교회에 대한 이해가 빈곤함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회학자들의 경우 교회의 등장을 어떤 사회적인 활동의 결과물처럼 이해하려고 시도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립하셔서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태로 존재하여 왔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새로운 형태, 더 발전된 형태의 교회가 (소위 신약의 교회라고 부르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수립되었습니다. 특히 그 역사의 순간이 성경의 사도행전 2장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과연 교회를 단순한 사회적인 단체, 공동체, 친목회, 신우회와 구별시키는 독특한 성격이 무엇이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 선교, 사회 봉사, 친목, 교육 등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일들은 꼭 교회라는 특수한 이름을 안 붙인 단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때로는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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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빈곤함

    기독교의 진수는 죽어서 천당가는 데에 있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내세에 국한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성경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과연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해 보면 대답이 모호하다는 것이 우리의 빈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공동체다 등 여려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가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 의식이 빈약하다면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각성이 빈약하다는 뜻일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란 단어가 죽어서 가는 곳이란 한정된 의미로 대개 사용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의 기록을 보면 (특히 누가복은 24장과 이어지는 사도행전 1장)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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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 Theology

    자유주의 신학의 거짓된 태도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 중엔 성경에 있는 기록 중엔 사실이 아닌 것이 있으므로 그런 것을 잘 구분하여 참된 것 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사실 아닌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신격화’라고 합니다.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차라리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면 거짓말에도 분수가 있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제 3자로서 다른 사람이 저지를 잘못에 대해 그것을 지적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자기”가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는 “자기”의 이름으로 도덕률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남의 잘못을 자신이 용서할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며, 또 자신의 권위로 도덕법을 제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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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 Theology

    사죄의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

    타인이 내게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도 싫어하는 세상인데, 누군가 난데 없이 나타나서 “네가 살면서 지은 죄를 용서해주마”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겠습니까? 내가 잘못한 일에 그 피해를 당한 사람이 나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제 3자가 뭔데 내가 죄 있다고 선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걸 용서까지 해준다 만다 하겠냐 말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위의 말씀을 하시고 “나에게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10). 그리고 자신의 말이 공허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실증으로 그 중풍 병자에게 명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다른 사람의 권위를 빌어서도…

  •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신학 | Theology

    예수님의 부활이 믿기 어려운 (또는 쉬운) 이유

    때는 예수님이 공적(公的)인 생활을 시작하신지 제 3년 가을, 이스라엘의 큰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오던 때, 성경에 의하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죽은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거나 선지자라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빠트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중 중 더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초막절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7:31): “그리스도 곧 메시야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러한 현상을 예수님께 아뢰지 않은 것을 보면 거기에 큰 무게를 두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나오는 베드로의 대답과 군중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엔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 구원 | Salvation

    믿음의 현재성

    너무나 당연한 것을 오늘은 기록합니다. 내가 누군가를—아내, 남편, 친구 등을—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지금 내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과거에 믿었다거나 미래에 믿겠다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전부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과거의 어떤 경험 또는 사실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눈을 들어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 봐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회개는 계속 됩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제 앞에 더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 전에는 알지 못했던 저의 더러움과 비천함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과거의 나의 회개 또는 믿음이 참된 것이었나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민에 빠져들어 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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