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회, 직장, 가정, 어디에서든 내가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시 68:19)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저 나는 성신께서 주장하사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나타나길 바래야 함을 배우다.
제 9 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요약하고 있는 십계명의 제 아홉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고 되어있다. 정직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계명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어떤 기자가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거짓말하신 적 있으십니까?” 물론 대답은 모두 “네”이다.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였는데, 대부분 머뭇거리다가 “평범한 사람” 또는 “그냥 사람이요” 정도였다. 기자가 이번에는 질문을 바꾸어 “제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시겠습니까?”라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거짓말장이”라는 대답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 21:8 정직은 세상 윤리에서도 강조 되는 것인데,…
아저씨의 웃음
소년이 알던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의 입가에는 늘 웃음이 있었는데, 마을에 가끔 오는 서커스 광대의 분장이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광대와는 달리 사탕을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저씨가 떠나던 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골목길에서 아저씨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뭔가 잔뜩 언짢은 말투들이었다. 조금 떨어져 쭈그려 앉아 들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얘기는 꼬리를 물었다. 광대의 웃음이 좋은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아저씨와 친하지는 않았지만만, 마주치면 인사를 꼬박 드리고 또 아저씨도 아는 체 해주었다. 한 번은 여름에 아저씨가 막걸리 한 주전자 사 오라고 시켰다. 막걸리를 들고 오니 아저씨는 먹던 감자 하나를 주었다. 아저씨는 “니가 먹는 감자가 얼마짜린지 아냐?” 하였다. 감자를 그리 안 좋아하던 소년에겐 어른의 술주정으로 들렸다. 말은 이어졌다, “세상…
Why We Must Forgive (왜 용서해야 하는가)
(This is a recollection of thoughts after reading “How Christ Walked on Earth” by Hong-Chun Kim.) Here’s a well-known passage of a dialogue that went between Jesus and his disciples regarding forgiveness: Then Peter came up and said to him, “Lord, how often wi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said to him, “I do not say to you seven times, but seventy times seven.” (Matthew 18:21,22; ESV) Jesus’ words gives us the impression that we have no choice but to forgive. Now, as it is for other aspects of Kingdom of God, forgiveness primarily takes place in the heart of…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중앙일보의 백성호 기자가 쓴 “정상에 진리가 있다는 … 두 산은 같은 산일까”를 읽고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나 여기 다시 올립니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큰 줄기를 간추리자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러가지지만 도달 지점은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여기에 동조할 수 없는가? 그 이유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순서로 얘기하자면, ▶ 첫째, 성경은 인간이 산에 오를 능력을 상실했다고 가르친다. 왜 능력을 상실했냐면, 다리를 잃은 것도 아니고 병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산에 오를 수 없다. 병든 사람에게는 “산 꼭대기에 너를 낫게 할 산삼이 있다”는 말이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3)…
믿음의 평범함
신령한 사람의 상태란 열정으로 가득차서 의심, 고민, 유혹도 없이 어떤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 나가는 상태라고 상상하며 알게 모르게 그러한 것을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반 년 가까이 예수님의 행적을 공부하면서, 또 요새 교회에서 듣는 욥기 강설과, 그리고 나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이 겪는 번민들을 보면서, 믿음의 행보라는 것은 요란법석한 것이 아니며 무슨 위대한 꿈을 꾸거나 종교 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때론 우시고 또 고민하시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시며 땀 흘려 이 땅 위를 걸으셨던 것 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한 것임을 이제사 조금 느끼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해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해야 제대로 한 것 같고, 찬송을 해도 감격에 겨워 눈물이 눈 앞을 가려야 제대로 부른 것 같고, 예배를 해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당연한 말이지만 ‘최근의 것’이 ‘향상된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학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학문의 귀납적 특성 때문에 항상 새로운 것을 쫓는 습관을 들이기가 쉽니다. 현대에 미친 과학의 영향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사회에 많이 퍼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심지어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성경과 관련된 종교의 역사 속에서 주옥과 같이 빛나는 열매가 있다면 나는 그 옛날 (까마득히 먼 옛날은 아니지만) 기록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단연 꼽고 싶다. 로마교회의 무서운 권력이 유럽에 뻗쳐 있던 그 때, 다음 첫 문답을 적어내려간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를 생각하며 읽노라면 무거운 감명이 가슴 깊이 퍼진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