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And, Glorious Heretic: the story of Guido de BresÌ> (by Thea B Van Halsema) 가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라는 제목으로 성약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서’라는 훌륭한 신앙고백이 나왔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문서들이 따분하게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소중하게 작성된 열매들인지 <하이델베르크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는 보여준다. 또한 성약출판사 웹사이트 자료실에 이 책을 읽고 풀어볼 수 있는 익힘 문제가 올려져 있다. 참 잘 만들어졌고, 특히 학생들이 이용하기에 좋다.
이방인과 세리를 대하듯 하라는 의미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곧 그만큼 큰 능력으로 섬기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건만, 내 뜻대로 상대를 좌지우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저의 삐뚤어진 눈과 마음에서 연유합니다. 나 자신의 잘못과 범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간과하시고 그 대가를 내게 다 씌우지 않으시길 바라면서도, 타인의 잘못과 죄를 보면 그 대가를 그 사람이 반드시 받길 비는 나의 마음은 어찌나 가증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아니하는 형제를 보거든 이방인과 세리를 대하듯 하라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요, 그렇기 때문에 주의 성찬을 함께 나누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배척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세리를 대하신 그대로, 곧 그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전히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면 저의…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하게, 자유스럽게, 자연스럽게 장성하는 자태
가족들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였다. IRC가 고백하는 사명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터라, 비록 내가 회원으로 몸 담고 있지 않지마는 이 교회의 행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 참가하였다. 교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나도 묻고 하면서 “신령하게, 자유스럽게, 자연스럽게”라는 말의 뜻을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는 말씀과 관련이 있으리라. ‘자연스럽다’, 또는 ‘무위'(無爲)라는 것과 ‘저절로’의 차이를 그동안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란 말씀의 진의를 더 잘 알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각성은, 죄의 종된 것에서 자유하려면 그리스도께 대하여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자기 전부를 드린 바 되었다는 것이 언제나 기저적으로 명확해야 한다. 거기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의미
이번 달 초에 저희 교회에서는 사경회가 있었는데, 초청된 목사님께서 골로새서를 강설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즉 나[我]라는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일부로서 새 생명 가운데 살게하신다는 진리가 어떻게 내게 나타나는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우리 가운데 계신 성신께서 그 은혜를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입혀주셔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매일 누리고 있는 것과 비슷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양 때들의 죄값을 대신해 받으시사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오늘도 시시로 죄를 범하지만 성신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대속의 공효를 계속적으로 입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정죄받지 아니합니다. 또한 이것은…
불안과 그 참된 처방
졸업 준비로 한동안 정말 바빴습니다. 지금은 짐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분주하겠고요. 요새는 불안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공부하고 있는 주님의 산상보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개역개정) 이 말씀으로 보건데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것은 곧 오늘 일도 우리가 근심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심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리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경우가 많죠. 물론 이것은 생각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세가 확고한 사람에겐 오히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은… …계란? ^^;;;;;;;;; 오늘 예배 시간에는 北 아일랜드 Limavady 개혁장로 교회의 Robert Robb 목사님께서 설교하셨다. 목사님은 질문하셨다: “제가 문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떤 문장의 일부를 읽어드릴테니 그것을 여러분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도록 완성해보십시오. 정직하고 솔직하게 해보십시오.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For me to live is ___.’ (`내게 있어서 삶이란 ___ 이다.’) 위의 ___ 부분을 채워보십시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읽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For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난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의 삶을 보라. 그 누가 나를 보며 “저 사람은 삶이란 그리스도라 여기는 사람 같군”이라 생각이나 하겠는가. 아니, 사람들은 둘째 치고, 나의 심장과 폐부를…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의미
요새 교회에서는 Sinclair B. Ferguson 교수가 쓴 <The Sermon on the Mount>라는 책과 더불어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공부하고 있다. 어떤 성경 본문을 공부하던지 그 본문을 담고 있는 전체 배경과 (지금의 경우 ‘마태복음’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본문이 등장하고 있는 문맥을 살피게 된다.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The Kingdom of God” (우리 말로는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말 외에도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은 (총 네 번 등장하는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When Jesus had finished saying these things) 이다. 이 어구를 기점으로 마태복음을 다섯 절로 나눌 때 역시 각 절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