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타락 하는 이유
전적으로 주만 의지한다는 참된 경건이 아닌 인간과 신의 합작이라는 세속 경건이 교회에도 들어와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셨다. 오직 성신님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셨으니 여기엔 사람의 그 무엇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은 극명한 것이다. 또한 참 경건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계시다. 이 진리가 우리를 지배하지 아니할 때 교회는 종교 단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모여서 사회 운동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하고 교제도 하고 즐거움도 있고 기도와 말씀을 읽는 가운데 마음의 위로도 얻고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만 경건의 모든 모양새는 갖추었으나 시대의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지혜도 없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배도의 탁류가 몰려와도 뭐가 뭔지 구분할 혜안이 없는 것이다. 이런 저회 상태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거듭난 사람의 생활 자태
하나님의 자녀가 장성하는 자태는 말씀이 들어가면 성신님이 그 말씀을 쓰셔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각오와 각성이 있게 하셔서 그가 ‘아,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하려 해도 그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 힘으로도 못하고 능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만 하는 것이다”(슥 4:6)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신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신님을 의지하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로 내가 “아니요” 하고 반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하고 거룩한 자태와 하나님 자식다운 자태를 생활 가운데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나 혹은 세상의 도덕이 하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느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한 사람이 중생하였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요 10:28). 이 새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은 그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골 3:4)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중생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실의 한 가지입니다. 중생한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더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 여기에서 너희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식으로 나를 사랑하지 말고 별다른 식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부모나 처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연장해서 더 열렬하게 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내가 부모, 형제, 친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런…
마귀가 아닌 자기 욕심에 유혹 받아 죄를 지음
나우웬12 님의 블로그에서 사람의 죄성에 대한 존 오웬 목사님의 인용을 읽었다. 거기엔 부패한 인간의 본성 속에서 나오는 추악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렇다. 자기 마음 속에서 이는 유혹들을 마귀와 귀신의 탓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죄 가운데 태어난 우리는 마귀가 손 끝 하나 건들지 않아도 스스로 온갖 추악한 것과 더러운 것들을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다. 마귀와 그 국권 세력은 사람이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고 죄 가운데 지내는 것이 용이하도록 이 세상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귀와 그 휘하의 귀신들도 대 심판주이시며 절대의 통치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일개 종의 위치에서 허락된 궤계를 꾸밀 뿐이다. 지극히 높으신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거니실 때 때때로 귀신들린 자들과 마주친 일이 있으신대, 그 귀신들은 자기들을 영원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열정은 피해만 드릴 뿐
마라톤맨 님의 블로그에서 글을 읽다가 다음의 칼빈 인용을 보았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 그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보면 얼마나, 얼마나 어리석고 형편없고 암매하며 저속한 나의 생각 아래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고, 또한 그러한 나의 열심을 비록 불완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여삐 받아주시리라고 생각했던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아무 쓸모 없는 나
존 오웬 목사님의 고백이 구구절절이 나의 얘기다. 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쓸모 없는 것이다. 심지어 나의 회개라고 하는 것도, 나의 다짐이라는 것도, 전부 소용 없고 오히려 그러했기 때문에 훗날 나의 배신의 죄를 더하는 것이다. 너무도 비참한 상태 가운데 있다. 도무지 해답이 없다, 그리스도 외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지혜와 진리와 은혜의 충만을 본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혜 만을 바라보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 내신 보람을 만들어 주시옵소서.
기도는 은혜의 방편
양태진 님의 블로그에 가면 VeldeKamp의 “Dreams and Dictators”를 읽어 가며 쓰신 다니엘서 6장에 대한 묵상이 있다. 거기서 나누고 있듯이 다니엘은 한 달간 기도를 금하는 령을 접했을 때 그는 “감사하며” 늘 하던대로 여전히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 기도를 하였다. 그에게는 ‘기도하는 자는 죽인다’는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이 더 두려웠으며 사실 기도를 그만 둔다는 것이 이미 죽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증인인가! 사실 다니엘을 공격하기 위해 적들은 한 달 동안 기도를 금지할 필요도 없었다; 하루면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기도 없이 지내기가 하루가 뭔말인가. 하나님의 나라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말씀, 예배, 찬송, 기도, 성례전, 헌상이라는 여섯 가지 통로를 마련하셨다. 그것을 무시하고서라도 그 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밥을 먹고 살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