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의 권세와 사랑의 아드님의 나라 중 지금 어디에 있는가
천지의 대주재로서 절대권을 행사하시는 주 하나님 앞에 만물은 마땅히 무릎을 꿇고 복종해야 할 종이다. 사람은 그런 하나님께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과 경외심으로 섬길 수 있는 영광을 허락 받았으나 아담은 범죄함으로 죄 아래 팔려 우리 모두는 죄의 종이 되었다. 그 결과는 너무도 비참한 것 — 곧,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다 (롬 8: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크신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구속하시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옮기사 (행 26:18)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 높은 자리로 우리를 끌어올려주셨다. 곧,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사랑의 아드님의 나라로” 옮기신 것이다 (골 1:13). 그 나라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뤄지는 나라요 (행 8:2-4),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나라다.…
인생의 경영자는 사람이 아니다
삶은 짧다. 특히 주위에 형 누나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젊은 시절 청춘의 경쾌한 웃음을 날리던 그들의 입 가에 중년의 중후한 미소가 서서히 나타나려고 하는 것을 보니 참 시간이란 유수와 같이 흐르고 사람의 삶이 짧은 것임을 느낀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4)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는 자꾸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것 처럼 생각하거나 자기가 주께 무슨 소용이라도 되는 것 처럼 스스로를 인정하기가 일수이다. 또 우리 주위에는 청년의 젊은 혈기를 이용하여 그들로 스스로 자행자지하도록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룩한 꿈을 꾸라면서 말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실 때 중요한 문제로 드신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배고픈 것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무시하고 자기의 지혜를 믿고 신통력을 발휘해서 미리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나누어서 하나님께도 드리고 다른 것에게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큰 글자라는 사실이야 말로 예수님이 항상 가장 강한 근거로서 유지하려 했던 명확하고 찬연하게 비치는 보루와 요새였습니다. 예수님은 늘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 김홍전,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
“안식일=토요일”은 아니다
제목을 먼저 설명해야겠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평명하게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제 4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을 때엔 “토요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여섯 날은 일하되 “제 칠일”은 쉬라고 하신 것이다 — 이 말씀은 “너희는 칠 일을 한 주기로 살아라, 여섯 날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나의 안식 속에 쉬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구약 교회의 경우 유월절을 기점으로 새 해가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달력상 토요일에 쉬게 된 것이지, 토요일의 그 무엇이 그날로 하여금 안식일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이것을 그 전에는 생각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달력 상 하나님께서 언제 세상을 창조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정말 지금의 주일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신 바로 그 날인가? 게다가 아브라함은 모세가 전한 율법을…
하나님 나라의 이 땅에서의 증시
나의 의지 약함이 다행스러운 것은 그로써 오직 의지할 분은 하나님 뿐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가 강해 뜻한 바를 이루는 사람이었다면 내게 있는 그 무엇을 인정하는 큰 교만 가운데 빠졌을 것이다. 버러지 만도 못하고 영벌에 처해져도 부족한 죄인을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을 뿐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 — 시편 107 中 그리스도께서 먼저 찾아와…
예수님 영화
난 예수님을 그린 영화가 좋지 않다. 사실, 피하고 싶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모습을 심어주기 보다는 자꾸 방해만 한다. 그와는 달리 복음서를 읽으면서 성신님이 비춰 주시는 예수님의 자태를 볼 때면 그저 감히 입을 열 수가 없다. 요한 사도의 고백 처럼 그저 “은혜 위에 은혜”다 — 통회와 감동, 경이, 경외. (그래서 4 복음서가 정경으로 채택이 되었겠지만.) 주님의 엄위와 권위와 인자 앞에, 나의 추악함은 드러나고, 자꾸만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분은 맡아 주실 것임을 느낀다. 간혹, 예수님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은 얼마나 복될까 생각들기도 하지만, 놀라운 성신님의 은혜로 말씀 가운데 그분의 아름다운 자태가 나에게 비출 때면, 정말 그분을 더욱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것이 다…
인간의 존엄
요새 미국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커플들을 불러 그들로 역겨운 음식(썩은 달걀, 지네, 벌레 등이 섞인 빵 등)을 씹게 하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씹은 후에 내 뱉고 또 다시 그것을 입에 넣게 만든다. 그것을 가장 많이 하는 커플에게 상금과 상품을 준다. 처음엔 상금만 많이 준다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 프로그램을 보니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인간 존엄성의 말살이었다. 돈이라는 것 앞에 자신이 평소에 하지 아니할 것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어려운 일이 아니라 썩은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시킬 수도 없는 것이고 해서도 아니되는 일이다. 그것을 돈이라는 것 앞에, 또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인간을 즐겁게 해준다는 이유로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