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공동체에 주신 비적
아래는 제가 그동안 공부한 내용들을 관심 있는 분들과 나누기 위해 정리한 것들입니다. 고백하건데 저는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Soli Deo Gloria!
비적(秘蹟) 혹은 성례전이라고 함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언약공동체가 늘 시행되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 언약의 상징과 증표들을 말한다. 우리 첫 조상 아담 때 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전해져 내려왔고, 그것을 간직한 언약공동체(교회)가 이 땅에 있어 왔다. 교회에게 그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공동체가 대대로 간직할 비적들을 주셨다. 눈에 보이는 언약의 상징과 증표들 덕에,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함을,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이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실체로서 우리 가운데 있음을 각성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비적은 하나님께서 언약공동체 곧 교회에게 주신 큰 은혜이다. 은혜의 언약을 수 천년이 넘도록 간직해온 언약공동체,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신실하게 보살피신 하나님의 나라 안에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는 것을 떠올릴 때 마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벅찬 감격이 밀려온다.
비적의 종류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주셨던 비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 주셨던 할례(베는 예식)
- 출애굽 할 때 모세를 통해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 주셨던 유월절 예식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 주셨던 주의 만찬(고린도후서 11:25)과 세례(마태복음 28:19)
여기서 기억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주셨던 할례는 모세를 통해 새롭게 하실 때에도 계속하여 시행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에 모세 이후에도 할례가 유월절 예식과 더불어 계속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출애굽기 12:48).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는 예전의 의식을 계속할 것을 명하시지 않았다. 이로써 이전 예식들은 종료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된 언약공동체인 신약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주의 만찬과 세례만을 비적으로 지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하신 언약은 다름 아닌 은혜의 언약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례와 유월적 예식, 그리고 세례와 주의 만찬 가운데 많은 유사성과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은혜의 언약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여기를 클릭.) 그러므로 우리가 신약의 비적인 세례와 주의 만찬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구약의 비적인 할례와 유월절 예식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적은 일차적으로 개개인이 아닌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것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맺으신 것은 그 분의 백성들, 곧 언약공동체와 맺으신 것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창세기 17:7; 예레미아 33:31
그리고 언약의 비적 역시 언약공동체에게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창세기 17:11; 누가복음 22:20
그러므로 성례전의 시행은 언약공동체(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지, 개인이 사사로이 행해서는 안 된다.
언약공동체가 언급된 김에, 나중에 발생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은 언약공동체의 기본 단위가 그 언약을 “믿는 자와 그 권속”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신명기 29:10-13; 사도행전 2:39
눈에 보이는 언약공동체(교회)에 반드시 구원 받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님
이스마엘도 언약의 상징인 할례를 받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난 자가 아니어서 결국 나중에 언약공동체에서 쫓겨났다 (갈라디아서 4:22–29). 또한 수 많은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그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를 부인하고 믿지 아니했다.
신약 시대에도 사도행전 8장 13–21절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마술사 시몬의 경우 믿음을 고백하기에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 들어온 표시로 세례까지 받았지만, 실상 (적어도 그 당시엔) 구원 받은 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눈에 보이는 언약공동체 (보이는 교회) 안에는 참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 있다고 꼭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약공동체는 그를 자신의 일원으로 여기고 그에게 언약공동체 일원의 표식을 주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출애굽기 12장 48절이나, 위에서 본 사도행전 8장 13–21절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성례전이 구원을 이미 받았다는 증거는 아님
방금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믿음을 고백하면 언약공동체 일원의 표식을 주도록 하셨지만, 그 표식을 받았다는 것이 그 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예컨대 세례를 받았다고 반드시 구원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의 예에서 분명히 보듯이, 어떤 사람이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 당시에 꼭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 이전에 구원 받았을 수도 있고, 세례 받고 오랜 후에 참된 믿음이 생길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군의 고백을 듣고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없으며, 또한 그런 권세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례와 같은 성례를 반드시 구원 받은 사람만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사람의 분수를 넘은 심히 외람된 말이며, 앞서 보았듯이 성경의 기록과도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세례를 못 받은 사람은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것도 성경과 위배된다 (예: 십자가 상에서 구원 받은 강도, 누가복음 24:43).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의 예에서 분명히 보듯이, 세례까지 받았지만 나중에 믿음을 배반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훗날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현재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못 믿겠다고 부인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을 우리는 언약공동체, 곧 교회의 일원으로 여기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보는 바이다.
주의 만찬과 유월절 만찬의 독특한 점 및 유사성
주의 만찬과 유월절 만찬은 유사점이 많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주의 만찬 예식을 제정하셨다 (누가복음 22장). 그래서 두 예식 모두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흘리심과 그로 인한 우리의 속죄를 생각하면서 먹을 것을 요구하셨다: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출애굽기 12:26-27; 고린도전서 11:27–29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또한 두 예식 모두 한 번 만이 아니고, 때를 따라 반복하도록 하셨다. 그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되새기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이 두 예식은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선언 하신 은혜의 언약을 때를 따라 새롭게 하신 사실과 연결된다.
세례와 할례의 독특한 점 및 유사성 (주의 만찬, 유월절 만찬과의 차이)
주의 만찬과 유월절 만찬의 유사점을 위에서 방금 보았는데, 성경은 또한 세례와 할례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로새서 2:11–12
특히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세례로 대치하셨음과, 할례와 세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 곧 언약공동체로의 입문을 상징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할례와 세례 모두 (생리적인 이유로 불가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와 그의 권속’을 한 단위로 해서 시행됨을 성경에서 본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창세기 17:23; 사도행전 16:15; 사도행전 16:33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즉 아직 언약의 의미를 다 모르는 아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이런 면은 언약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는 사람이 참석하도록 한 유월절 만찬 또는 주의 만찬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
위에서 우리는 할례와 세례 모두 언약공동체로의 입문을 상징하며, 믿는 자와 그 권속을 단위로 해서 시행된 것을 성경에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언약의 의미를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면에서 불합리하다:
첫째,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즉 언약의 의미를 분명히 자각하면서 참여하도록 하신 성례전은 주의 만찬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또한 우리는 성례전이 구원 받은 증거로 베푸는 것이 아니며, 구원 받지 못했는데도 성례전에 참여한 예를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는다.
둘째, 어린 아이는 어느 정도 커서 자의식이 생기기 전에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따라한다. 어리면 어릴수록 그러하다. 부모가 신앙이 있으면 그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어린 유아가 말을 못한다고 해서 불신자 취급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적인 이치에도 어긋난다. 만일 유아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람의 언어로 번역해줄 기계 같은 것이 있다면, 그래서 부모가 믿는 바를 얘기해 주고 너도 믿느냐 묻는다면, 유아들은 반드시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셋째, 할례/세례는 어디까지나 언약공동체로의 입문을 상징한다. 언약공동체 속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들어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해야 하겠지만, 나면서부터 언약공동체에 있던 사람은 자자기가 더 이상 언약을 믿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 이상 나면서 부터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김을 받는 것이다. (한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국인으로서 국적을 얻고 권리와 의무를 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성경은 언약공동체로의 입문을 상징하는 성례로서 세례가 할례를 대치시킨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골로새서 2:11–12), 어린 아이를 제외시키라는 명령은 커녕, 두 성례 모두 신자와 그의 권속을 단위로해서 시행되었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창세기 17:23; 사도행전 16:15,33). 이는 신자와 그의 권속을 언약공동체의 기본 단위로 여기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신명기 29:10-13; 사도행전 2:39
그러므로 신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성경적이다.
갓난 아기에게도 언약의 상징을 베풀도록 하신 또 다른 이유를 우리는 은혜의 언약의 성격에서 엿볼 수 있다. 즉 구원이 전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다시 말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임을 생각할 때,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갓난 아이들에게도 은혜의 언약의 표징을 시행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비적은 언약의 상징으로서만 끝나지 않음
우리가 위에서 수 차례 확인했듯이, 성례전은 어떤 사람이 꼭 구원 받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하지만, 만일 분명한 구원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성례전에 참여할 때에는, 그에게 그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도장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가 받은 할례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4:11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언약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적이 언약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갖는데, 만세 전에 택하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상징 뿐만 아니라 인(印)으로서 작용한다. 그래서 신자는 비적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과 그것을 이룬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리며 큰 확신을 얻게 된다.
지엽적인 문제 몇몇
비적, 특히 할례와 세례와 관련해서 종종 만나는 지엽적인 문제 몇 가지를 다루겠다.
할례를 왜 남자에게만 시행시키셨는가
이것에 관해서는 이미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었는데, 여기서는 한 가지만 제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할례 자체가 남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동의 어떤 곳에서는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만 음부에 있는 피부 일부분을 잘라내는 여성 할례를 시행하는 곳도 있다. 특히 남성 우월적인 문화권에서 그렇다. 아브라함의 시대도 남성 우월 사상이 강했고, 그가 속해 있던 문화권에서는 자손이 남자의 생식기를 통해 전달 된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 속에서, 남자의 생식기의 일부를 베는 의식을 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생식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다.
세례가 아닌 침례인가
“세례”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baptizo’는 직역하면 “씻다”이며, 명사형인 ‘baptismos’는 “씻음”이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7장 4절의 경우 Textus Receptus를 보면 ‘탁자를 씻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을 만일 “탁자를 물에 담근다”고 읽는다면 견강부회일 것이다.
언약신학 노트
- 행위의 언약
- 구속의 언약
- 은혜의 언약
- 언약공동체에 주신 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