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이다. 감히 어떤 것은 내가 누려 마땅하다는 듯,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해 불만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불평할 자격이 없으니, 나는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주님의 거룩한 나라에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주께서 권고하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내 무한한 형벌을 대신 받길 원하실 정도로 사랑하셨다. 그런 주님 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내 분수를 넘어서는 말이다; 그저 감사하며 늘 우러러 보며 좇아가야할 것이다. 어린 아기가 부모가 없어지면 죽는 줄 알고 그 품에 안기는 것 처럼, 그리스도 만을 전부로 의지하고 기뻐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내게 가장…
호세아 13: 사람의 인정, 재력, 그리고 정치 권력
호세아 13장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만든 것을 13장에서 찾아보자면 그 마음이 기대서는 아니될 것들 곧, 사람들의 인정 (1절), 재력 (6절), 정치 권력 (10절), 이것들에 기댄 결과 무서운 심판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만을 전부로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의 것들은 이 세상에서 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찾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위의 세 가지가 똘똘 뭉쳐있다.) 사람들이 선을 추구한다고 노력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신 것은 역시 옳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 조차 이상의 것들에 기대는 죄악을 범하는 일이 오늘 날 왜 없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조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1서 4장 1-2절 일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을 경계했다. 그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의미 보다는 그 분의 삶이 보여주는 영적, 정신적, 혹은 윤리적인 교훈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사신 것과 그 분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의 관계를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이심을 시인하지 않고 그 분께서 사랑과 나눔의 본을 보여 주신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오늘날 어떤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성화(聖化)의 가장 강한 동기는 그리스도 처럼 변화하리라는 믿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1서 3장 中) 이와 관련한 설교 두 편을 추천해 드립니다. 지난 주일 아침과 저녁에 전달 된 강설입니다. A Vision of Christ (요한계시록 1장) When We See Christ (요한1서 3:2–3) 아래는 요한1서 3:2–3에 대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말: I suppose we must agree that nothing more sublime than this has ever been written, and any man who has to preach upon such a text or upon such a word must be unusually conscious of his own smallness and inadequacy and unworthiness. One’s tendency with a statement like…
요나와 예수님의 차이
요새 우리 교회에서는 요나서가 강해 되고 있다: 요나서 1장 1–3절 강해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느니 차라리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끊여지길 원하였다. 요나는 밤새워 고민을 했는지, 폭풍을 만난 배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 우리의 모습이다; 자신의 욕구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을 내팽겨쳐 버리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버림 받고 죽어 마땅한 그런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우리가 받아 마땅한 저주와 끊겨짐을 대신 받길 다짐하셨다.
Lessons from the Grain Offering
(Thoughts after reading Chapter 8 of “On Offering”, Vol 1, by H. C. Kim) In my child days, I remember seeing people bringing rice to church for offering. This is not so common where I am now; probably the most common material we see brought for offering would be money. Money is closely linked to our daily life; it represents potential for various things. In that sense the nature of the monetary form, which is common for offering in our day and age, is closest to the Grain Offering (Leviticus 2). Grains are used daily and it produces energy for our life, so it represents potential for various works. Another…
타인의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누림
한국 전쟁 뿐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당시 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전쟁터에 나가 적을 물리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생각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희생 위에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있다. 그들이 꿈을 포기했기에 우리는 꿈을 꿀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지금 당장 전 인류를 지옥불에 넣어 멸망시켜야할 이유와 근거가 하나님께는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 분의 한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참으신다. 참으신 것 뿐만 아니라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은 나를 그 분 일부로 삼으사 내 죄의 형벌 까지 받아주셨다. 그 분이 맞으심으로 내가 오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그러니 일 분 일 초를 나를 위해 살 수 없는 일이니, 그리스도의 것으로 늘 살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