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왕비 보다 더 아름다운 분
이스라엘 민족에게 “푸림”(פורים) 절기는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이지요. 이날은 페르시아 제국 아래 있을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던 하만(המן) 장군의 계략으로 부터 에스더 왕비의 활약으로 구원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에스더 왕비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뛰어난 미모로 아하수에르(Xerxes) 대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만 장군의 계략으로 부터 무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의 사촌인 모르드개는 그녀가 아하수에르에게 가서 이야기를 하여 민족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페르시아 법에 의하면 왕이 부르지 않은 사람이 왕의 안 뜰에 들어올 경우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일한 예외는 왕이 황금 홀을 내밀어 그를 용납할 때입니다. 30일이 지나도록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갔다가 자기 목숨을 잃고 민족도 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한 후 왕에게 나아갑니다. 다행히도 왕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
요새 교회에서 저녁 예배 때는 욥기가 강설되고 있다. 아직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을 보고 있다. 그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부분적으로 옳은 얘기도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릇된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가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이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생사화복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세 친구들을 탓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는 아직 계시의 초반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세상이야 윤리를 가르쳐도 나 개인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가에…
회개하고 또 죄를 지를 것을 아시고 용서하심
어제 주일 예배 말씀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조건 없는 사랑, 저에겐 그것이 정말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노라면 너무도 결점과 죄악 투성이라서, 아무래도 하나님의 본심은 “참 꼴도 보기 싫지만 ‘언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한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 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저를 반기시리라 느껴집니다. 아마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온 그녀는 그 심정을 알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그녀를 비난하는 군중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주님은 그녀 앞에 계십니다. 제가 그녀였다면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 이제 올 것이 왔다… 우려하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죄를 짓는 현장에서 걸려 주님과 맞닥뜨렸다… 무어라 하실까… ‘너는…
삶이란 무엇인가
삶은… …계란? ^^;;;;;;;;; 오늘 예배 시간에는 北 아일랜드 Limavady 개혁장로 교회의 Robert Robb 목사님께서 설교하셨다. 목사님은 질문하셨다: “제가 문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떤 문장의 일부를 읽어드릴테니 그것을 여러분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도록 완성해보십시오. 정직하고 솔직하게 해보십시오.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For me to live is ___.’ (`내게 있어서 삶이란 ___ 이다.’) 위의 ___ 부분을 채워보십시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읽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For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난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의 삶을 보라. 그 누가 나를 보며 “저 사람은 삶이란 그리스도라 여기는 사람 같군”이라 생각이나 하겠는가. 아니, 사람들은 둘째 치고, 나의 심장과 폐부를…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실 때 중요한 문제로 드신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배고픈 것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무시하고 자기의 지혜를 믿고 신통력을 발휘해서 미리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나누어서 하나님께도 드리고 다른 것에게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큰 글자라는 사실이야 말로 예수님이 항상 가장 강한 근거로서 유지하려 했던 명확하고 찬연하게 비치는 보루와 요새였습니다. 예수님은 늘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 김홍전,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역사서를 볼 때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 열두 권의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통치의 대상인 나라에 대해 주로 가르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중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정치, 즉 신정(神政)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누구의 정치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정치입니다. 이처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권이 나타나는 또 한 가지의 면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왕은 왕권을 행사하기 위한 지역과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왕의 대권, 통치의 대권을 행사하시는 지역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고, 그 대상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신 백성 위에 행사하시는 통치 대권의 특성은 무엇인가 할 대 그것은 은혜와 진리와 공의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은혜의 왕국’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는데 신학 용어로는 레그눔 그라티아에(regnum gratiae)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
그러면 ‘독처’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미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서 세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 곧 부부의 합일에서 비로소 구현됩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 및 복수성은 아담이라는 한 개체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까닭에, 반드시 하나 이상, 그러나 동시에 그게 하나가 될 수 있는 다른 개체를 요구했습니다. 둘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움직이심의 여러 양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사람의 정신 생활, 혹은 영혼의 여러 기능의 움직임 가운데 만일 한 인격만 있었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그 양태를 모방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