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고려할 것
혼인의 원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다 (엡 5:31–32). 돌려말하자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닮은 일체성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혼인의 관계이다. 이와 관련된 김헌수 목사님의 강설 중 일부분이다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교회 안에서도 ‘혼인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런 것을 물을 때에 물밑에서 몰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과 삶의 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상대의 반응이 있으면, ‘우리 서로 교제의 기간을 정하여 놓고 주님께서 혼인으로 인도하시는 일이 있을지 잘 확인해 보자’는 그런 이야기를 서로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몰래 하다 보면 오히려 이상한 쪽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숨기는 것보다는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자신을 평가하거나 믿음으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은 상당히 신령한 지혜가 요구되는 문제입니다. 부모님이나 믿음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나 아니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보다 더 중요한 언약의 관계
“인격적 관계”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핵심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인격신(人格神)이심을 알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귀신들도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알고 두려워 앞에서 떤 다는 점에서 마귀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 욥기 1장; 마가복음 5:6,7)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 기독교 계에서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언약의 관계입니다. 이 언약의 관계는 당연히 인격적 관계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 관계’라는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와 사랑이 거기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언약 파괴자인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은혜의 언약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인격적 관계’라는 말과 관련하여 다음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의 의미 (에베소서 5:22)
여기서 주의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든 하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 자기의 의식을 다 버린 채 무감각한 기계가 돼 가지고 ‘이렇게 하라’ 하면 ‘예’, ‘저렇게 하라’ 하면 ‘예’, 그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뜻을 더욱 궁구하고 살펴서, 그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식별해서, 그래서 우리가 알았을 때는 자진해서 즐겁게 성신님을 의지하여 순종하고 나갑니까? 그것은 물론 그렇게 자기가 인식하고 각성하여 자기가 확신한 다음에, 이번에는 자기가 성신님을 의지해서 자진해서 순종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이요, 그렇지 않으면 기계적인 굴종일 뿐입니다. 성경이 아내에게 가르치는 것은 자기 남편에게 굴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참된 가정, 그리고 교회
가정은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상적인 관계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 이상적인 관계를 예표 해주는 존재로 있는 것이 바로 보이는 교회[有形敎會]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보이는 교회의 기초적인 단위로서, 언제나 교회의 건실한 세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과 교회라는 말을 생각할 때 주의해야 할 문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모든 관계가 이 세상에서 보게 되는 현상의 가정에서 다 발생하거나 확연히 다 확인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가정이 지니는 독특한 현상을 반드시 교회 안에서 다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교회가 모든 부면(部面)에서 가정의 의상형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영원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고 땅에 있되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 가정은 하늘 위에 있지 않고 오직 땅에만…
종합적이고 견고한 부부의 사랑
그리고 사랑이 중요하다고 그랬는데, 그 사랑이 [부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양을 나타내는 중요한 또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독처하는 사람에게서는 존재하지 않다가 대상이 있음으로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야 세상에 사람이 많으니까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을 못한다는 법이 없으나, 혼인을 안 했을 때의 사랑은 부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혼인을 안 했을 때는 이성(異性)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거기에 또 봉사하는 아가페의 사랑이 붙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친족의 사랑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혈통적인 사랑은 아직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플라토닉하고, 그리워하고, 위하여 목숨이라도 다 주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위하여 목숨을 주겠다는 것은 반드시 혈통적인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박애(博愛)에도 있는 것이고, 남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다 버릴 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
그러면 ‘독처’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미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서 세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 곧 부부의 합일에서 비로소 구현됩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 및 복수성은 아담이라는 한 개체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까닭에, 반드시 하나 이상, 그러나 동시에 그게 하나가 될 수 있는 다른 개체를 요구했습니다. 둘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움직이심의 여러 양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사람의 정신 생활, 혹은 영혼의 여러 기능의 움직임 가운데 만일 한 인격만 있었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그 양태를 모방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혼인, 가정과 교회
부부의 원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내시되 그냥 내시지 않고 부부로 내신 것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상 가운데 처음부터 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의 완성이라는 것을 구상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 도달케 하시려는 크신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그 완성된 아름다운 자태의 한 모형으로, 상징으로 땅 위에는 부부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의 존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형상이 땅 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과 예정에는 인류의 목적지에 대한 거룩한 구상도(構想圖)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입니다. 완성된 보편의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장차 완성될 새로운 인격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와 같은 목표로 지어진 까닭에 사람이 개인적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처음부터 전제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개인으로서 교회의 완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