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고난을 무리하게 그리려고 해서는 안됨
고신대 박영돈 교수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이다: 멜깁슨이 감독한 패션 어브 크라이스트 라는 영화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받히는 끔직한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고 저미게 하며 눈시울을 적시게 했습니다. 그런 영화는 참 감동이 되는데 십자가 사건에 대한 복음서의 말씀은 별로 감동이 안 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도 십자가에서 주님이 당한 육체적인 고통을 자세히 묘사하여 사람들의 감성을 터치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 설교자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교인들의 감성을 터치하는 설교를 하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인들의 감정에 무리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순수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을 생각하며 우리의 순종을 기도해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24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24문은 주기도문의 세번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의미를 묻는다 (아래는 독립개신교회 번역본): 124문: 셋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1], 유일하게 선하신 주님의 뜻에 불평 없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2]. 그리하여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과 소명을 [3] 하늘의 천사들처럼 [4] 즐거이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하게 하옵소서.” [1] 마 7:21; 눅 9:23; 딛 2:11-12 [2] 눅 22:42; 롬 12:2; 엡 5:10 [3] 고전 7:22-24; 딤전 6:1-2; 딛 2:4-5 [4] 시 103:20-22 아래는 이에 대한 김헌수 목사님의 강설 중 일부분이다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문에서 우리는 ‘순서’를…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고 장사되시기까지 받으신 고난
우리로서는 영혼과 육신에 관한 문제를 다 알 수 없고, 따라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의 의미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그냥 빼버리지 않고 좀 더 성경적인 표현에 가깝게 생각하면 오히려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으로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고 육신으로 가장 낮은 데까지 내려가신 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함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서 지옥의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실 때까지 지옥의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죄악 가운데 잉태되고 출생한 우리의 죄를 주님의 순결함과 거룩함으로 가려 주셨고, 또한 죄 때문에 무덤에 묻힌 우리를 거기에서 구원하여 주시려고 친히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복지 국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고난과 하나님 나라
내겐 컴플렉스가 있다. 지금까지 편안한 삶을 지내왔다는 컴플렉스다. 주후 3세기 동안 그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견딘 성도들을 훗날 무슨 낯으로 뵐까…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과 안전이라고 하는 것, 그것과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가 그 영광의 정점에 이르는 과정에 통과해야 할 고난 (골 1:24). 이 둘을 조화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 무식한 초짜니 당연하지. 아, 그러나 지금까지 품지 못했던 마음과 관념 하나가 나를 스치고 갔다. 그것은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감히 함부로 누릴 수 없는 큰 영광이라는 것. 그런 높은 영광은 나 같은 것은 감히 떠올려볼 자격도 없다. 어줍짢은 도덕과 윤리관을 가지고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길이라 여기며 나갈까 두렵다. 나의 비참함을 나는 더욱 알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