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되어 인용되는 인기 구절 (2):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는 야고보서 2장 24절 말씀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왜곡 되어 인용된다. 칭의라고 하는 신학 용어는 쉽게 말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죄 없는 자로 여긴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언뜻 보면 칭의를 위해서는 사람의 행함도 필요하다고 가리키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러려면 성경에서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항상 ‘칭의’를 뜻하는 것이어야 할텐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야고보서의 이 말씀을 가지고 쓰여진 좋은 글들이 많이 있는데, 국어로 쓰여진 것 중엔 개인적으로 쏙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이번 기회에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적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고보서 2:24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δικαιόω)라는 표현은 칭의 말고도 다른 뜻으로 성경에서…
왜곡되어 인용되는 인기 구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장 21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상당히 많은 경우 “믿음 못지 않게 행위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그 의미가 왜곡 되어 인용 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7절에 걸쳐 기록된 산상보훈의 결미를 여시는 말씀으로서, 그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믿음은 있었으나 행위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그 무엇을 행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열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지막 심판의 그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의지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우리는 과연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할 이유로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우리도 이…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이다. 감히 어떤 것은 내가 누려 마땅하다는 듯,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해 불만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불평할 자격이 없으니, 나는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주님의 거룩한 나라에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주께서 권고하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내 무한한 형벌을 대신 받길 원하실 정도로 사랑하셨다. 그런 주님 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내 분수를 넘어서는 말이다; 그저 감사하며 늘 우러러 보며 좇아가야할 것이다. 어린 아기가 부모가 없어지면 죽는 줄 알고 그 품에 안기는 것 처럼, 그리스도 만을 전부로 의지하고 기뻐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내게 가장…
성화(聖化)의 가장 강한 동기는 그리스도 처럼 변화하리라는 믿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1서 3장 中) 이와 관련한 설교 두 편을 추천해 드립니다. 지난 주일 아침과 저녁에 전달 된 강설입니다. A Vision of Christ (요한계시록 1장) When We See Christ (요한1서 3:2–3) 아래는 요한1서 3:2–3에 대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말: I suppose we must agree that nothing more sublime than this has ever been written, and any man who has to preach upon such a text or upon such a word must be unusually conscious of his own smallness and inadequacy and unworthiness. One’s tendency with a statement like…
기적이 믿음을 주지 못함
기적으로 사람을 믿게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지상에서 활동하셨을 때 이스라엘 민중은 다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증거한다 해도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자가]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6장 29-31절) 물론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라 함은 “토라와 느비임” 곧 성경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현재성
너무나 당연한 것을 오늘은 기록합니다. 내가 누군가를—아내, 남편, 친구 등을—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지금 내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과거에 믿었다거나 미래에 믿겠다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전부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과거의 어떤 경험 또는 사실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눈을 들어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 봐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회개는 계속 됩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제 앞에 더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 전에는 알지 못했던 저의 더러움과 비천함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과거의 나의 회개 또는 믿음이 참된 것이었나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민에 빠져들어 가서는…
교리에 대한 믿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과 관련된 교리들을 믿는다는 것 보다 예수님 당신을 믿는 것이란 이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바른 교리를 믿는 것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보다 예전엔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제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은 부분들도 나온다. 요 근래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후의 이야기가(마 17장) 강설되었다. 거기 보면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결국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는데,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하고 묻는다. 이것은 자기의 영력(靈力)에 대한 의문던지 또는 자기네가 예수님을 본 그대로 흉내냈는데 왜 안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 신앙을 이러한 식으로 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제자들의 이 질문을 나의 질문이라 생각했을 때,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