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과 세리를 대하듯 하라는 의미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곧 그만큼 큰 능력으로 섬기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건만, 내 뜻대로 상대를 좌지우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저의 삐뚤어진 눈과 마음에서 연유합니다. 나 자신의 잘못과 범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간과하시고 그 대가를 내게 다 씌우지 않으시길 바라면서도, 타인의 잘못과 죄를 보면 그 대가를 그 사람이 반드시 받길 비는 나의 마음은 어찌나 가증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아니하는 형제를 보거든 이방인과 세리를 대하듯 하라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요, 그렇기 때문에 주의 성찬을 함께 나누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배척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세리를 대하신 그대로, 곧 그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전히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면 저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몇 주 전부터 교회에서는 예수님과 교회의 신비로운 연합을 주제로 말씀이 증거되고 있다. 어제는 요한일서 4장을 읽었다. 지금까지 그 본문은 항상 사랑을 강조하는 율문처럼 느껴졌었는데, 성령님께서 새롭게 마음을 밝혀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물론 여기에 강조는 “사랑”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전체에 있다 —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9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다는 것임을 어째서 지금까지 몰랐던가. 물론 머리로는 예수님의 희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사랑한다는 것에 율법이 있음
하나님 나라의 법은 결국 사랑이라는 큰 계명 안에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의 의미를 어렵게 배우고 있다. 그것 없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주장 아래 계명들을 지키려 해 보아야 고역일 뿐이다. 마음 속에 사랑을 심어주셔야 한다. 심장에 사랑이 있다는 사람이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는 공경이다. 사랑이 있다는 사람이 이성을 바라볼 때 자기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바라볼 리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거짓 증언을 할 수 없는 것이고, 탐욕을 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이지만, 이처럼 대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먹물을 도화지에 뿌리면 검어지지만 갱지에 뿌리면 희어진다는 말 처럼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이 하나님께 대하여 나타날 때는 경외라는 사실이 가장 크게 나타나겠지만, 같은 인간 끼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느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한 사람이 중생하였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요 10:28). 이 새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은 그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골 3:4)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중생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실의 한 가지입니다. 중생한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더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 여기에서 너희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식으로 나를 사랑하지 말고 별다른 식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부모나 처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연장해서 더 열렬하게 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내가 부모, 형제, 친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런…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실 때 중요한 문제로 드신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배고픈 것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무시하고 자기의 지혜를 믿고 신통력을 발휘해서 미리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나누어서 하나님께도 드리고 다른 것에게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큰 글자라는 사실이야 말로 예수님이 항상 가장 강한 근거로서 유지하려 했던 명확하고 찬연하게 비치는 보루와 요새였습니다. 예수님은 늘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 김홍전,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
하나님을 사랑함
죄를 미워하기를 노력하기 보다는, 더 거룩해지기를 노력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 그분께 나의 전부를 드리기를 원해야 하며 그분은 나의 전부를 받으셔야만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죄를 싫어하게 되어 있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기 보다는 사랑하는 습성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습성을 없애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정을 주셨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욕심(慾心)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던 옛것이 미워지는 것이다.
교리의 배교만이 배교가 아니다
여기 마태복음의 이 종말론 이야기 가운데에서는 복음이 만방에 전파된다는 것, 그래서 모든 민족이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된다는 것, 그 다음에 장기간일는지는 몰라도 좌우간 환난과 핍박과 고통–이것은 소위 대환난(the great tribulation)이라고 하는 것인데–그것이 또한 올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회의 불안뿐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 보이는 형식의 교회 안에서도 사랑이 식고 미워하는 일들이 자꾸 생길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런 일이 자꾸 퍼져 나가는 것이 결국 배교해 가는 길입니다. 배교라는 것이 교리만 가지고 자꾸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백번 잘 믿는다고 하고 정통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서로 미워하고 또한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심정이 없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이것을 참아야겠다든지 저것은 내가 꼭 해야겠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없으면 그것은 결국 배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