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聖傳)이 아닌 성경(聖經)에 유일한 권위를 두셨던 예수님과 바오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의사를 계시하시는데 성전(聖塼) 또한 사용하신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요,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오고 오는 신도들이 항상 믿고 따라야 한다고 영구히 선언한 것이다. 그것이 만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전하시고 성경(聖經)으로 남게 하신 하느님의 의사와 어긋난다면 어쩔 것인가? 자기는 누구의 가르침을 따르네, 누구는 또 누구의 가르침을 따르네, 하며 갈등을 빚던 교인들에게 바오로 사도를 통해 가르치신 것은 이것이다: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1코린 4:6) 여기서 ‘기록된 것’이라 함은 물론 그 당시 기록으로 남아있던 것 곧 구약 성경이라 할 수 있겠다 — 사도가 하는 말이라고 해서 믿을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으로 뒷받침 되는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 성경이 하느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아는 이유 중…
성경을 더 읽자 (하)
지난 글에서는 성경 통독을 위한 그랜트 호너 교수의 방식을 (살짝 변형한 것) 소개했다. 마지막 편인 이번 글에서는, 약속했던대로, 도움이 될만한 스마트 폰 앱(app) 몇가지를 소개한다. 독자들께 죄송스럽지만, 졸인이 사용하는 컴퓨터와 전화기가 애플(Apple) 제품이다 보니, 아래 소개하는 앱들도 맥(Mac) 혹은 아이폰(iPhone)용 앱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윈도우즈, 리눅스, 그리고 안드로이드 시스템에서 쓸 수 있는 앱은 열심히 알아보지 않았음을 미리 밝힌다. 참! 그리고 졸인은 ESV 번역을 선호하기 때문에, 한글 성경 앱 또한 그다지 알아보지 않았다. OliveTree Bible+ : 성경 읽기 앱이다. 전화기와 컴퓨터에 모두 설치할 경우, 각각의 기기에서 작성한 노트 혹은 표시들을 동기화(sync)할 수 있다. 무료. 안드로이드, 윈도우즈 뿐만 아니라 킨들 용(用) 또한 있다. ReadingPlan : 위의 성경 읽기 앱 Bible+ 역시 다양한 성경 통독 프로그램을 기본적으로…
성경을 더 읽자 (중)
지난 글에서 성경을 읽는 방식으로 숲을 두루 두루 살피는 방식과 나뭇잎 하나 하나을 들춰 보는 방식의 읽기가 병행 되어야 함을 언급했다. 편의상 전자를 성경통독, 후자를 성경공부라고 지칭하겠다. 이번 글에서는 성경통독과 성경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졸인이 사용하는 방법을 소개하려 한다. 주일과 토요일은 성경공부를 위해 따로 떼어놓는다 돌려 말하자면 성경통독은 주중에 한다. 성경 공부는 주께서 그 분의 교회를 위해 성경 교사로 세우셨다는 증거를 역사 속에서 보인 사람들의 강설과 주석을 이용한다. 영어로 된 자료들 중에 졸인이 애용하는 것은 칼빈의 주석들이다. 국어로 된 자료 중에는 단연 김홍전 박사의 강설들이다. 김홍전 박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박사님이 성경 공부를 할 때 사용했던 큰 주제 다섯 가지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이전 글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체계적이어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것이 마땅함을 언급했다.)…
성경을 더 읽자 (상)
[youtube=http://youtu.be/VPLrqB_T9wY] 성경 — 마르지 않는 샘에서 길어 올린 물 처럼 항상 신선한 하나님 나라의 도리와 사상 가운데로 그 나라의 백성들을 이끄시기 위해 성신께서 사용하신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시편 119:98–100) 성경이 전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의 주된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들 곧, 교회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종교적인 혹은 도덕적인 수양 보다는 교회의 각성과 장성이 일차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행보 안에서 개인의 당위가 서는 것이다. 성경이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성경의 오의들을 해명할 사람들을 교회에 세우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역사와 지역을 초월하기 때문에, 교회에 주신…
한국에서 ‘정의/불의’라는 말이 갖는 의미, 그리고 하나님 나라
지난해 많이 읽힌 책 중 하나가 샌델 교수가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인데, 왜냐하면 실상 한국 사회에서 ‘정의/불의’ 하면 ‘착한 짓/나쁜 짓’ 정도의 의미로 그동안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루뭉술한 개념으로 남아 있는 것의 문제점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사회가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유난히 ‘정의/불의’라는 말이 난무하는 것을 보지만, 여전히 ‘착한/나쁜’ 정도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체 쓰이는 경우가 많다. 유력 후보가 두 명 있는데, 양쪽 지원자들 가운데서 상대편 지원자를 ‘불의의 자식들’로 묘사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북한과 친하게 지내고 나라를 팔아먹을 놈들’ 혹은 ‘자기 이익을 위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과 같은 패’라고 여기는 것이 그 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진정성이 잘못된 방법을 보완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도리를 붙잡고 아무리 각고면려한다 해도 하나님께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완고함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큰 가르침 중 하나이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 사무엘 선지자가 전해 준 말씀이다. 이 큰 도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람들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는 사람의 경우, 진정성만 있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 바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가납하시고 승인하신 방법과 길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겨 주시느냐 말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마태복음 7:22에 나오는 질문의 성격과 유사하다. 내가 아는…
4대 복음이 목격자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라는 놀라운 증거들
4대 복음은 신문 기사와 신화적 이야기 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요? 여기에 대한 피터 윌리엄즈 교수의 훌륭한 강의입니다. (누가 한글 자막을 달면 좋겠네요.) [youtube http://youtu.be/Z5vrFAAhpss] 정경에 나타난 정확성/탁월함은 상상했던 것 이상입니다. 외경은 도무지 비교가 되질 않네요. 신화적 이야기라고 종종 공격 받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관찰 (45:17) 또한 매우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