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는 하나다 (유아세례와 성인세례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음)
언약신학의 기본적인 내용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언약의 확실함을 알리시는 방도 중 하나로 눈에 보이는 예식들을 제정하셨다. 이러한 성례전(聖禮典)들은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언약의 표(表, sign)가 된다. 그 표가 상징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인(印, seal)으로서도 작용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할례와 유월절 만찬이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성례전이었다. 할례는 입문 (enterance) 예식이고, 유월절은 새롭게 (renewal) 하는 예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할례와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하신 것이 세례와 성찬이다. 구약과 신약의 구분은 언약을 성취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후의 시기적 구분이지, 두 개의 다른 언약을 믿은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언약을 믿는 하나의 언약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할례, 유월절, 세례, 성찬 모두 동일한 언약의 성례전들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성례전 시행에 있어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어도 큰…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칼빈 선생은 로마서 14:17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아니하므로 형제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못 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 선생의 성경을 읽는 깊은 눈을 다시 한 번 본다. 성신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한 것은 그 기쁨 혹은 즐거움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낸다고 칼빈은 또한 이야기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자의 기쁨이다. 세상은 이런 저런 기쁨에 대해 이야기들을 하지만, 양심 깊은 곳에서 자리잡은 나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는 한 그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성도의 교통 (Communio Sanctorum)
오늘 예배 시간에 우리 부부와 David라는 형제를 교회의 회원으로 받는 간단한 순서가 있었다. 우리는 앞에 나가 하는 것에 대답을 하였고, 대담을 마친 후 교회의 회원들이 일어나 우리를 교회 회원으로 받아 서로 권면하며 사랑 가운데 교통할 것을 서약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의지하여 목사님의 질문에 대해 대답해 나갈 때, 마치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나라로 옮기심을 받았고 그분의 교회로 서 있다. 다만 오늘 교회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해 나갈 때 마치 우리의 모든 것을 직고하는 백보좌 심판의 그 날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우리를 형제로 받아 주었을 때 저 훗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때가 이렇지 않을까 하는…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거연히 자기가 일어나 사랑을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럴꺼면 그건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것이다. 우린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우리 죄 값을 치루실 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 되어 사랑에 대해 자유치 못한 우리를 마침내 자유케 하시려고 그리스께서 그 고난을 다 받으신 것이다, 그 채찍을. 그러니 다시는 돌아가서 자기의 그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일이 아닌 것이다, 일이.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며 우리에게 아드님 나라의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이제 마침내 우리로 그 높고 아름다운 새 계명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자리로 옮겨 놓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게.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치 않던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