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열심을 품으라고 한 이유 (로마서 12:11)
By adding fervent in spirit, he shows how we are to attain the former; for our flesh, like the ass, is always torpid, and has therefore need of goals; and it is only the fervency of the Spirit that can correct our slothfulness. Hence diligence in doing good requires that zeal which the Spirit of God kindles in our hearts. Why then, some one may say, does Paul exhort us to cultivate this fervency? To this I answer, — that though it be the gift of God, it is yet a duty enjoined the faithful to shake off sloth, and to cherish the flame kindled by heaven, as it for…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보다 더 중요한 언약의 관계
“인격적 관계”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핵심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인격신(人格神)이심을 알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귀신들도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알고 두려워 앞에서 떤 다는 점에서 마귀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 욥기 1장; 마가복음 5:6,7)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 기독교 계에서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언약의 관계입니다. 이 언약의 관계는 당연히 인격적 관계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 관계’라는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와 사랑이 거기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언약 파괴자인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은혜의 언약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인격적 관계’라는 말과 관련하여 다음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서 행해야
나의 자아와 싸우라는 말씀이 아니다. 나의 자아에서 나오는 모든 죄악된 생각, 또는 선을 이뤄야겠다는 의지 등 그 모든 것과 싸우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거듭나기 전과 지금과의 차이는 예전에는 그 자아 곧 옛사람이 죄의 노예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자유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의 종된 것에서 해방시키셔서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케 된 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사실이고, 실제로 하나님 나라적인 행보를 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향해 할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 이것 역시 성령님께서 주시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신을 좇아 행하라는 말씀에는 다분히 전적으로 성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성신께서 우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