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죄 사하는 권세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온다 (지붕을 뚫고). 거기엔 바리새인들도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인데 어찌 저리 참람된 말을 하는가!’ 생각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물으셨다. 다음은 이 부분에 대해 김홍전 박사님의 “예수님의 행적”과 Mathew Henry의 주석을 일고 공부한 것의 정리이다. 첫째로, 주님께서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보건데 이 중풍병자의 병은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중풍병자 자신은 이 사실을 또한 알고 있었으리라.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세례 요한의 훌륭함
이스라엘 민중이 아직도 그들의 전통적인 메시아관에 갖혀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할 때 세례 요한은 과연 왕의 길을 예비한 사람답게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대중은 복지국가를 건설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세례 요한은 인간의 죄의 문제가 선결(先結) 문제라는 것을 바로 보고 있었다. 죄와 사망과 흑암의 권세에 매여 있는 사람에게 복지국가 열 개를 건설해 준다 한 들 소용 없는 일이다. ▶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 1:30) 일반 민중은 그 전통적인 유일신관에 꽉 사로잡혀 삼위일체는 커녕 오실 메시야가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느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한 사람이 중생하였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요 10:28). 이 새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은 그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골 3:4)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중생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실의 한 가지입니다. 중생한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더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 여기에서 너희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식으로 나를 사랑하지 말고 별다른 식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부모나 처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연장해서 더 열렬하게 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내가 부모, 형제, 친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런…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실 때 중요한 문제로 드신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배고픈 것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무시하고 자기의 지혜를 믿고 신통력을 발휘해서 미리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나누어서 하나님께도 드리고 다른 것에게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큰 글자라는 사실이야 말로 예수님이 항상 가장 강한 근거로서 유지하려 했던 명확하고 찬연하게 비치는 보루와 요새였습니다. 예수님은 늘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 김홍전,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방식
그러나 우리 주님이 어떤 사람을 붙들고 말씀을 하실 때는, 그사람의 의표(意表) 이외의, 그가 생각한 이외의 전연 딴것을 가지고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사람과 이야기하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은 전연 생각지도 않고 준비도 안 된 것을 문제로 내놓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야기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모처럼 시간을 얻어서 또한 그만한 기회를 타서 예수님께 나와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니고데모한테, 그가 전연 생각지도 않고 꿈도 안 꾼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마치 “너 이런 것도 모르느냐?” 하고서는 공격을 하듯이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거나 사람을 다루거나 대하실 때 그런 방법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자비롭고 따듯하게, 항상 가장 이해를 많이 하시는 분으로서 하십니다. 가장 이해를 많이 하시는 분으로서 니고데모 속에…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음
예수님은 아버지를 이 세상에 나타내시고 가르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때때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결함이 많은 자기의 생각이나 추리나 연구 등을 통하여, 혹은 기도할 때에 얻은 느낌이나 배움을 통하여 얻은 것을 하나님의 뜻인 것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지적하신 점을 주의해야 한다. 즉, 예수님을 통하여 틀림이나 부족함이 없이 나타내신 성부(聖父)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만 한다고 하신 점이다. 따라서 성부이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깊이 배우고 깨달아서 비로소 아는 것이다. — 김홍전, “복음이란 무엇인가” 中
자기 백성을 향한 구주님의 마음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다 보시는 구주님의 마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아버님, 도우시옵소서.. 사소한 일에서 제 자신의 선한 의지나 도덕률로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아직 알지 못하고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입지 못할 때가 허다합니다. 저의 가난함과 무력함을 매사에 알고 성신님만을 의지케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로 채워져 그리스도로 저의 부요함이 되게 하시옵소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