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과 종말을 상고하는 유익 (히브리서 12:18–29)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천당과 지옥이라는 상벌을 놓고 종교행위를 강요한다고 오해하나,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할 하나님의 택하심을 ‘이미 받은 자’라고 가르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믿기만 하면 앞으로 뭔짓을 해도 천당간다 가르친다고 오해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삶을 위한 가장 큰 동기가 됨을 가르쳐준다. 이것이 예정과 종말을 상고하는 유익 중 하나이다. 히브리서 12장 18–29절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열 세 가지 기적을 체험한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음
그 옛날 이집트의 파라오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뒤 다시 지팡이가 되고,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온 땅을 뒤덮고, 티끌이 벌레로 변하고, 파리 때가 넘치고, 가축들이 돌림병으로 죽고, 사람과 동물들이 종기로 인해 죽고, 우박과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남은 곡식을 메뚜기 때가 와서 먹고, 흑암이 지면을 덮고,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들이 죽고, 홍해와 자기 군대 사이에 불구름 기둥이 막는 것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별된 것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천하를 다스림을 보고도 파라오는 하나님께 절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파라오]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성화(聖化)는 의지가 아닌 믿음의 열매
성화와 관련한 에서, 성화는 도덕적으로 고결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능력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로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깨닫고,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바꾸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기 때문임을 앎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하여 ‘뜻하신 것을 이루시옵소서’ 아뢰는 믿음의 순종이 성화의 길이라고 적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나는 돌부처 처럼 가만히 있어도 되겠네’ 혹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맨 처음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입은 사람에게 새 생명이 활동하도록 하시는 것이니, 그 사람은 결코 꼼짝 않고 있을 수 없다. ‘생명’은 그 말의 정의상 정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성화(聖化) 또한 구원의 예정 가운데 포함 되었음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예정과 선교
어제 교회에서 어떤 선교사님의 고백을 들었는데, 처음 선교를 떠날 땐 “예정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선교를 하겠는가”고 생각했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 선교의 어려움을 체험한 후 이제는 “예정이 없다면 어떻게 선교를 하겠는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더 열심을 내야 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택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요, 그들에게 나아갈 것을 주께서 명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을 내느냐에 따라 상대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영향받는다면, 그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무수한 반대와 핍박을 받고도 기뻐하였던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리라. 하나님의 나라가 참으로 임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리라. 믿고 의지할 분은 상천하지에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흑백논리의 위험성
예컨대 어떤 건강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반드시 숨을 쉬게 되어 있다. 사람의 유전자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다음과 같이 지금 한 번 해 보자: “내가 지금 부터 숨을 쉬어야지”하고 1분이라도 숨을 쉬어 보도록 보자. 귀찮고 힘들어진다. 신경이 자꾸 쓰이고, `숨쉬는 것이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나’ 싶을 것이다. 왜? 우리는 숨을 쉬려고 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다. 숨을 쉬도록 말이다. 가만 있어도 계속 숨을 쉰다. 심장이 뛰는 것도 마찬가지다. 팔, 다리 근육과는 달리 심장 근육은 ‘아, 심장을 계속 움직여야겠다’ 해서 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심장이 뛰지 않았으면’ 해도 계속 뛰는 것이 심장이다. 끊임 없이 뛴다. 이것이 生命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심장을 칼로 찌른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