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
사람은 자범죄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든지 보는 죄들입니다. 신문에서도 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당하는 죄들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것들을 아주 여러 곳에서 뚜렷이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한 군데 더 보면, 마태복음 15:19-20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범죄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후에 자기가 배워서 하는 것들입니다. 또 야고보서 1:14-15에도 보면, 이런 자범죄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문답: 질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아래는 김헌수 목사님의 에서 발췌: ‘조용한 밤에 자기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혹은 ‘자기의 양심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경험이나 양심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율법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생의 경험과 양심으로 비참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판단을 내리는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판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판단합니다. 자기는 잘못을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으면 자기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을 낮춥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자기를 판단하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죄를 계속 지어도 구원 받았나요?
회개를 주제로 하여 개혁주의의 핵심—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30여 분 짜리 녹음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루는 내용 중 몇 가지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개와 성화는 다른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회개는 “change of mind”이고, 성화는 “change of life”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 죄의 심히 죄된 것을 아는 것이고 슬퍼하는 것이고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회개와 성화가 비슷한 부분도 있다; 둘 다 믿음의 열매이고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결과로 생긴 것이다; 둘 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다; 참된 회개와 성화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발생하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다.
믿음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라는 의미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김홍전 著) 을 읽던 중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는 말씀에 대한 강설을 읽다가 하늘에 속한 믿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믿음은 분명 평범한 믿음 — 예를 들면 ‘나는 내가 지금 걸린 이 불치병에서 나을 것을 믿는다’는 그런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것에 그러한 믿음을 적용하거나 발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믿음은 궁극적으로 공리적인 것으로서, 세상 사람들도 ‘조국의 무궁한 발전을 믿는다’거나 ‘사랑의 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이 숭고한 믿음을 갖고 그 믿음 위에서 자신의 생활을 전개해 나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믿은은 하늘에 속한 믿음이 분명합니다.…
죄의 추악함
사람 속에 있는 죄의 추악함을 느낀다. 가르침과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죄성이 분출될 기회와 가능성이 적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죄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인 군자일수록 자신을 반성하고 매일 참회록을 쓴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에 퍼져있는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죄악들을 볼 때 그러한 죄악의 근원이 내 마음 속에도 있다는 것과, 또 때를 따라서 그것이 정도만 약할 뿐 미약하게 발산되는 것을 확인한다. 그럴 때 인류의 커다란 죄악 가운데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무고한 살인과 학살이라는 극악한 죄악도 결국 미움과 탐욕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열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 안에 있는 작은 미움 작은 탐심이 얼마나 더럽고 썩은 것인지 느끼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 눈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조금이나마 느끼는 것이다…
나의 죄의 비참함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는 말씀을 교리적으로 알 것이 아니라, 나의 양심과 지식에 의한 죄책감이 아닌, 하나님의 법이 드러내는 나의 비참함을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속에서 나오는 모든 악함 — 그것이 보여 주는 나의 부패한 것을 알고, 내게선 도무지 선한 것이 나오질 않고 또 나올 수 없다는, 그 비참함을 나는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는가.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시편 119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