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원을 에누리하면 사기꾼이지만, 진리를 에누리하면 타인을 배려함인가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 그런 문제라면 논쟁할 것도 없고, 설령 논쟁하더라도 백 번이면 백 번 다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안이 중대해질수록 타협의 여지는 줄어든다. 정부가 자녀 출산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한가? 이것은 짜장면과 짬뽕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과는 그 중차대함에 있어 전혀 다르다.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라면 어떻겠는가? 나 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내 자식, 아니, 온 인류에게 적용 되는 영원한 생명의 문제라면 어떻겠는가? 그 보다 더 중요한, 혹은 논쟁할 가치가 있는, 혹은 싸울 가치가 있는 문제가 있는가? 하지만 돈 1 만 원을 에누리하면 사기꾼이라 욕해도, 영원한 생명이 걸린 진리를 에누리하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교회가 시대의 앵무새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는 세대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미 시작된 한국 사회의 변화가 향후 한국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다. 교회가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상당한 경우 교회는 사회의 앵무새 노릇을 해왔다. 엘룰(Ellul)의 말을 빌린다: 과거에 교회가 빈곤층을 무시했다면, 지금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이민 노동자들과 가까이 한다. 과거에 독재 정권을 뒷받침했다면, 지금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과거에 절대적 진리와 교리를 주장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믿도록 둔다. 과거에 엄격하고 잔인한 성(性) 도덕을 가르쳤다면, 지금은 낙태와 동성연애를 옹호한다. […] 이것은 진보가 아니다. 교회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동시대 사회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수용했을 뿐이다.…
추상적 진리의 실증
하나님 나라의 도리들이 그저 입으로 전해졌을 때는 그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 부터 시작하여 죄 사함이라든지 구원,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라고 하는 것 등의 내용이 다 그렇다. 그런데 그런 추상적인 것들을 실체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여주신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 중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시고 또 그로 인해 믿음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성령님의 은혜이리라. (사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진리’란 반드시 실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증케 하심을 본다. 예전에는 어떤 잘못을 범해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래서 되겠나” 또는 “이렇게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와 일부에게서 이러한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