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 Gospel

    “복음을 살아낸다”는 어불성설 (You Can Not Live The Gospel)

    “복음을 살아낸다”(Live out the gospel)는 표현은 복음에 대해 본질적인 오해, 혹은 단순히 언어의 애매한 사용이다. 이 표현이 유행하다보니 우리는 그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언행 혹은 사고방식을 우리는 버릴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가장 선한 동기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우리가 복음을 “의지해서” 살 수 있고, 복음에 “근거해서” 살 수는 있어도, 복음 그 자체를 살아낼 수는 없다.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은 그 본질에 있어서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1 내 삶을 통해 하신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이루신 일이기 때문이다.2 복음은 “전도”(preaching)을 통해 전달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고,…

    Comments Off on “복음을 살아낸다”는 어불성설 (You Can Not Live The Gospel)
  • bm,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신자의 삶에 대한 칼빈의 사상

    신자의 삶에 대한 칼빈의 태도 혹은 신학에 대하여 근래에 마이클 호튼 (M. Horton) 교수가 책을 냈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관련된 인터뷰들 몇몇을 읽고 혹은 듣고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책에 대한 추천사에서 싱클레어 퍼거슨 (S. B. Ferguson) 교수는 경고(?)를 하고 있는데, 신자의 삶에 대한 칼빈의 사상에 관한 책이라고 읽기 시작하지만 곧 칼빈의 신학 전체를 맛보게 되는 책이라 한다. 과연 그렇다. 그것이 참 신앙, 참 신학,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이다 — 한 두 마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깊이는 우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항간에는 소위 ‘칼빈주의 5대강령’과 같은 말들이 돌아다니지만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잘못된 표현인지를 생각할…

    Comments Off on 신자의 삶에 대한 칼빈의 사상
  • 구원 | Salvation,  복음 | Gospel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 결과이지 근거가 아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2, 63, 64 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2–64 문은 우리의 행위와 구원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아래는 독립개신교회 번역본이다): 62문: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 [1].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2]. 63문: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상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3], 그래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상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4]. 64문: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5]?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Comments Off on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 결과이지 근거가 아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2, 63, 64 문)
  • bm,  구원 | Salvation,  복음 | Gospel

    왜곡되어 인용되는 인기 구절 (2):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는 야고보서 2장 24절 말씀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왜곡 되어 인용된다. 칭의라고 하는 신학 용어는 쉽게 말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죄 없는 자로 여긴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언뜻 보면 칭의를 위해서는 사람의 행함도 필요하다고 가리키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러려면 성경에서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항상 ‘칭의’를 뜻하는 것이어야 할텐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야고보서의 이 말씀을 가지고 쓰여진 좋은 글들이 많이 있는데, 국어로 쓰여진 것 중엔 개인적으로 쏙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이번 기회에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적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고보서 2:24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δικαιόω)라는 표현은 칭의 말고도 다른 뜻으로 성경에서…

  • bm,  복음 | Gospel

    왜곡되어 인용되는 인기 구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장 21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상당히 많은 경우 “믿음 못지 않게 행위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그 의미가 왜곡 되어 인용 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7절에 걸쳐 기록된 산상보훈의 결미를 여시는 말씀으로서, 그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믿음은 있었으나 행위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그 무엇을 행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열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지막 심판의 그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의지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우리는 과연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할 이유로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우리도 이…

  •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두 마음을 품은 사람 (여호난)

    예레미아 40장에서 43장에 걸쳐 기록된 것을 보면, 여호난과 그 무리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극심한 불안감 앞에 자기들이 이집트로 가야 할지 아니면 이스라엘 땅에 거하여야 할지 하나님께 여쭈어달라고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간구한다. 그들은 어떠한 지시가 내려오던지 반드시 청종하겠다면서 간청하였다. 예레미아가 기도한지 열흘 만에 주의 말씀이 임하였다: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으면 살 것이지만 이집트로 가면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호난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예레미아는 그 이유로서 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자기 눈으로 봤을 때는 참으로 간곡하고 확고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같지만 주의 눈으로 보았을 땐 참된 신앙이 아닌 경우가 있다. “주여, 모세에게 하셨듯이 제게 분명히 알려만 주시옵소서,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참으로 주를 신뢰하고…

    Comments Off on 두 마음을 품은 사람 (여호난)
  •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선을 행해야 하기에 선행하였다면, 그것은 자기의 선의지를 섬긴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선행하였다면,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 형통하기 때문에 선행하였다면, 그것은 행복의 신을 섬기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선행하였다면, 그것은 법을 섬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길을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입는 사람은 자기에겐 하나님 나라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룰 능력이 없음을 안다.

    Comments Off on 하나님을 사랑하는가